분당 신도시 최초입주자 철저확인 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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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생 강경대군의 장례는 서울시청앞 노제를 둘러싼 당국과 강군사건
대책회의측의 대립이 끝내 풀리지 않은채 충돌상황을 초래, 서울 도심이
또다시 폭력시위사태로 얼룩졌다.
*** 강군 장례행렬 지루한 노상대치 ***
명지대에서의 발인및 영결식과 신촌로터리에서 열린 `6인열사합동
국민추모제''를 마친 운구행렬은 당초의 계획대로 시청앞 진입을 시도하다
이화여대앞 로터리에 이르러 이곳에 마지노선을 친 경찰병력의 제지를
받고 시청앞 노제가 무산되자 완강히 저항, 페퍼포그차를 불태우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저지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한편 이날의 강군 장례에 맞춰 부산.광주.마산등 전국 15개 도시에서는
강군 추모집회가 열렸으며 집회에 이은 가두시위가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추모제
명지대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상오 11시 25분 신촌로터리로 향한
운구행렬은 7백여m쯤 행진,학교 인근 홍남교에 이르러 경찰의 1차 제지를
받자 이곳에서 낮 12시 10분부터 하오 3시 20분까지 3시간여동안 경찰과
대치한 후 당초 예정시간을 훨씬 넘긴 하오 5시 20분께 신촌로터리에
도착했다.
이처럼 운구행렬의 행진 속도가 늦어진 것은 홍남교에서 연희동쪽으로
향하려는 행렬을 경찰이 "연희동은 교통량이 많은데다 전.현직 대통령의
사저가 있어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자 장례위원회측이 이에
불응,연좌농성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학생,근로자,시민등 10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하오 5시 50분부터 시작된
합동추모제는 최근 분신자살한 경원대생 천세용군등 5인의 대형 영정을
실은 푸른색 트럭 5대가 행사장에 도열한 가운데 서울대총학생회장
이철상군의 개회사로 시작, 6인열사의 넋을 기리는 묵념과 합동분향,
조시낭독, 권영길언노련위원장의 경과보고, 지선스님의 추모사 순으로
진행됐다.
지선스님은 추모사에서 "조국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고인들은
열정적으로 살아왔고 결국 자신의 목숨을 조국에 바쳤다"며 고인들을
애도했다.
합동분향이 진행되는 동안 참가학생들은 6인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면서 "해체 민자당"등의 구호를 외쳤다.
한편 `서노문협'' 의장대행 김경란씨(35)는 임시로 마련된 무대위에서
살풀이 춤으로 고인들의 넋을 달랬다.
추모제는 30분만인 6시20분 사회자의 폐회선언과 함께 참가자들의
박수로 끝났다.
*** 화염병/돌멩이 날아 부상자 속출 ***
<>이대앞 충돌
추모제에 참석한 학생.재야인사등은 노제를 지내기 위해 시청앞으로
향하다 하오 6시 35분께 이화여대 입구 로터리에서 미리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중이던 경찰이 다연발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이에 맞서
화염병.돌멩이등을 던지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페퍼포그차 3대가 학생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불길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돌멩이등에 맞아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경찰은 이날 운구행렬의 도심진입을 막기 위해 이곳에 50개 중대
6천여명,공덕동로터리에 40개 중대 4천여명등 모두 90개 중대 1만여명의
병력을 배치, 저지선을 구축하고 일선경찰서에서 가져온 2백여개의
바리케이드를 밧줄로 묶어 차단벽을 설치하는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이화여대앞 로터리에서 동교동로터리에 이르는 8차선도로와
서강대앞 - 연세대 입구까지의 6차선도로를 메운 학생.시민들의 수적인
우세에 밀려 운구행렬이 시청앞으로 향하는 것을 막는데 진땀을 뺐다.
시위에 가담한 학생, 시민들의 수는 시위가 격화되고 밤이 깊어감에
따라 하오 9시께는 3만여명으로 줄어들었다.
대책회의측은 신촌로터리에서 시청쪽으로의 진입이 어렵게 되자
"경찰이 계속 운구행렬의 행진을 막을 경우 신촌로터리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가겠다"고 밝히고 "만약 경찰의 해산작전이 시도되면 인근 서강대나
연세대로 영구를 옮겨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도심시위
이화여대 앞에서 운구행렬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사이 전대협소속
대학생 2천여명이 하오 8시30분께 종로2가와 3가로 진출, 경찰이
다연발최루탄을 발사하자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하오 8시35분께는 5백여명의 학생들이 신세계백화점 앞 차도를
점거한채 화염병 30여개를 던지며 기습시위를 했다.
<>영결식
이에 앞서 장례위원회측은 이날 상오 9시5분 강군의 모교인 명지대
학생회관 1층 소강당에서 발인제를 가진후 대운동장으로 영구를 옮겨
상오 9시45분부터 동료 학우및 정계,재야인사와 시민등 6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을 가졌다.
''애국학생 고 강경대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은 강군의
영정입장에 이어 이수호대책회의 집행위원장의 사회로 문익환목사의
개식사,약력보고,조사,조시 낭독,헌화,열사부활굿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김종식전대협의장(23.한양대사회4)은 조사를 통해"강경대동지를 비롯
6명의 열사는 비롯 육신은 떠나갔지만 우리의 가슴속에 투쟁의지로
살아오고 있다"며 "영결식이 치러지는 이 시간에도 열사의 죽음을 배후세력
운운하며 왜곡하고 있는 정부는 진정한 사과의 뜻을 영결식장에 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지역 대학생 2천여명으로 구성된 경호대의 호위 아래 상오
11시25분 영결식장을 떠난 운구행렬은 흰 옷차림의 학생 8명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앞장을 선 가운데 선도차,영구차,5백여개의 만장등으로 긴
대열을 이루며 영결식장을 나섰다.
대책회의측의 대립이 끝내 풀리지 않은채 충돌상황을 초래, 서울 도심이
또다시 폭력시위사태로 얼룩졌다.
*** 강군 장례행렬 지루한 노상대치 ***
명지대에서의 발인및 영결식과 신촌로터리에서 열린 `6인열사합동
국민추모제''를 마친 운구행렬은 당초의 계획대로 시청앞 진입을 시도하다
이화여대앞 로터리에 이르러 이곳에 마지노선을 친 경찰병력의 제지를
받고 시청앞 노제가 무산되자 완강히 저항, 페퍼포그차를 불태우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저지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한편 이날의 강군 장례에 맞춰 부산.광주.마산등 전국 15개 도시에서는
강군 추모집회가 열렸으며 집회에 이은 가두시위가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추모제
명지대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상오 11시 25분 신촌로터리로 향한
운구행렬은 7백여m쯤 행진,학교 인근 홍남교에 이르러 경찰의 1차 제지를
받자 이곳에서 낮 12시 10분부터 하오 3시 20분까지 3시간여동안 경찰과
대치한 후 당초 예정시간을 훨씬 넘긴 하오 5시 20분께 신촌로터리에
도착했다.
이처럼 운구행렬의 행진 속도가 늦어진 것은 홍남교에서 연희동쪽으로
향하려는 행렬을 경찰이 "연희동은 교통량이 많은데다 전.현직 대통령의
사저가 있어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자 장례위원회측이 이에
불응,연좌농성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학생,근로자,시민등 10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하오 5시 50분부터 시작된
합동추모제는 최근 분신자살한 경원대생 천세용군등 5인의 대형 영정을
실은 푸른색 트럭 5대가 행사장에 도열한 가운데 서울대총학생회장
이철상군의 개회사로 시작, 6인열사의 넋을 기리는 묵념과 합동분향,
조시낭독, 권영길언노련위원장의 경과보고, 지선스님의 추모사 순으로
진행됐다.
지선스님은 추모사에서 "조국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고인들은
열정적으로 살아왔고 결국 자신의 목숨을 조국에 바쳤다"며 고인들을
애도했다.
합동분향이 진행되는 동안 참가학생들은 6인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면서 "해체 민자당"등의 구호를 외쳤다.
한편 `서노문협'' 의장대행 김경란씨(35)는 임시로 마련된 무대위에서
살풀이 춤으로 고인들의 넋을 달랬다.
추모제는 30분만인 6시20분 사회자의 폐회선언과 함께 참가자들의
박수로 끝났다.
*** 화염병/돌멩이 날아 부상자 속출 ***
<>이대앞 충돌
추모제에 참석한 학생.재야인사등은 노제를 지내기 위해 시청앞으로
향하다 하오 6시 35분께 이화여대 입구 로터리에서 미리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중이던 경찰이 다연발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이에 맞서
화염병.돌멩이등을 던지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페퍼포그차 3대가 학생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불길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돌멩이등에 맞아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경찰은 이날 운구행렬의 도심진입을 막기 위해 이곳에 50개 중대
6천여명,공덕동로터리에 40개 중대 4천여명등 모두 90개 중대 1만여명의
병력을 배치, 저지선을 구축하고 일선경찰서에서 가져온 2백여개의
바리케이드를 밧줄로 묶어 차단벽을 설치하는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이화여대앞 로터리에서 동교동로터리에 이르는 8차선도로와
서강대앞 - 연세대 입구까지의 6차선도로를 메운 학생.시민들의 수적인
우세에 밀려 운구행렬이 시청앞으로 향하는 것을 막는데 진땀을 뺐다.
시위에 가담한 학생, 시민들의 수는 시위가 격화되고 밤이 깊어감에
따라 하오 9시께는 3만여명으로 줄어들었다.
대책회의측은 신촌로터리에서 시청쪽으로의 진입이 어렵게 되자
"경찰이 계속 운구행렬의 행진을 막을 경우 신촌로터리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가겠다"고 밝히고 "만약 경찰의 해산작전이 시도되면 인근 서강대나
연세대로 영구를 옮겨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도심시위
이화여대 앞에서 운구행렬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사이 전대협소속
대학생 2천여명이 하오 8시30분께 종로2가와 3가로 진출, 경찰이
다연발최루탄을 발사하자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하오 8시35분께는 5백여명의 학생들이 신세계백화점 앞 차도를
점거한채 화염병 30여개를 던지며 기습시위를 했다.
<>영결식
이에 앞서 장례위원회측은 이날 상오 9시5분 강군의 모교인 명지대
학생회관 1층 소강당에서 발인제를 가진후 대운동장으로 영구를 옮겨
상오 9시45분부터 동료 학우및 정계,재야인사와 시민등 6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을 가졌다.
''애국학생 고 강경대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은 강군의
영정입장에 이어 이수호대책회의 집행위원장의 사회로 문익환목사의
개식사,약력보고,조사,조시 낭독,헌화,열사부활굿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김종식전대협의장(23.한양대사회4)은 조사를 통해"강경대동지를 비롯
6명의 열사는 비롯 육신은 떠나갔지만 우리의 가슴속에 투쟁의지로
살아오고 있다"며 "영결식이 치러지는 이 시간에도 열사의 죽음을 배후세력
운운하며 왜곡하고 있는 정부는 진정한 사과의 뜻을 영결식장에 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지역 대학생 2천여명으로 구성된 경호대의 호위 아래 상오
11시25분 영결식장을 떠난 운구행렬은 흰 옷차림의 학생 8명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앞장을 선 가운데 선도차,영구차,5백여개의 만장등으로 긴
대열을 이루며 영결식장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