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이 소련땅에 처음으로 이주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7년 전인
1863년 9월21일 모스크바방송이 한 재소 한인작가의 글을 인용 보도했다.
*** 한국인 3세의 큰 인용 보도 ***
내외통신에 따르면 이 방송은 소련에서 기자겸 작가로 활동중인 한인
3세 김 부르트는 최근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 부록으로 발행되는
"소유즈"에 기고한 "소련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역사와 현황"이란 글에서
1863년 9월21일에 첫 한인 이주민들이 소련국경을 통과했다는 기록문서가
있으며 이후 8년만인 1871년에는 "술탄"강가 "조선에서의 지나친 봉건적
압박과 농민들의 토지수탈, 그리고 빈곤"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했다.
그는 이어 이주초장기에는 소련정부가 광활한 지역을 개발하는데 이용할
목적으로 호의적으로 대해 농기구나 식량을 공급하면서 세금특전도
제공했다면서 이에따라 1910년 무렵 프리모리에 지방에는 모두 5만명의
한인들이 이주해와 처음으로 벼와 조를 재배하고 양잠을 치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 일본 간첩활동에 유리하다고 판단 ***
김부르트는 스탈린 시대의 한인탄압과 강제이주의 이유로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고성무교수가 지적한 <>소련위정자들이 프리모리에 한인
촌락들이 일본의 간첩활동을 위한 유리한 환경이라고 생각한 점 <>한인들의
밀집거주가 유사시 자치제를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낸 점등을
적시하면서 이같은 판단은 자신의 견해로는 거의 진상에 가깝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강제이주후의 생활에 언급, "이주이후의 처지가 비참했고
토굴이나 축사에서 살아야 했으며 습관이 되지 않은 기후와 비위생적
상태때문에 어린이들이 수백명씩 죽고 정권당국이 권리를 백방으로
제한했음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소매를 걷고 생소한 고장에서
새 생활을 건설했다"고 말하고 스탈린이 죽은 50년대 초에야 비로소
한인들이 소련인과 동등한 권리를 찾게 됐다고 지적했다.
한편 김부르트는 현재 소련거주 한인들이 4명의 인민대의원을 비롯해
과학과 문학, 스포츠등 모든 분야에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오랫동안 우리는 대이주의
신도롬때문에 괴로움을 느낄 것"이라고 기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