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원이면 술에 안주까지"…'초저가' 식당의 정체 [현장+]

서울 종로구 송해길 인근 노포 '부자촌'
1000원에 막걸리·소주 한잔
빈대떡·강냉이 등 주전부리 무료
어르신들 "마음의 안식처"

'잔술' 국무회의 의결…이르면 이번 주부터 시행
"잔당 고부가가치 매길 수 있는 주류 중심으로 확대 전망"
1000원이면 술 한잔과 안주를 즐길 수 있다. /사진=김영리 기자
"솔직히 하루가 너무 길어. 시간을 어떻게 주체를 못 하겠어. 노인들이 어디 갈 곳이 있어야지. 여기서 술 한잔 먹는다는 핑계로 1시간 서 있다가, 이따가 탑골공원 가선 그냥 벤치에 누워있는 거야."

22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에 탑골공원 옆에 위치한 잔술집 '부자촌'에서 만난 이백호(가명·66) 씨는 "오늘 벌써 두 번째 들려서 막걸리를 마신다"며 이같이 말했다. 18년간 노숙 생활을 하다 인근 고시원에서 산 지 2년이 지났다는 이씨는 "과거 얘기는 묻지 말아달라"며 "고시원에서 주는 김치와 밥으로 끼니를 때우곤 부자촌에 들러 형님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삶의 낙"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부자촌은 17년간 종로 탑골공원 송해길 옆을 지켜온 '잔술집'이다. 1000원에 소주, 막걸리를 한잔 가득 내준다. 쓰린 속을 달랠 빈대떡, 단무지 등 주전부리는 무료다. 넉넉한 인심과 세월을 거스른 듯한 가격에 노인들에겐 사랑방으로 통한다.

좁지만 정이 넘쳐흐르는 곳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 위치한 잔술 식당 '부자촌.' /사진=김영리 기자
부자촌은 탑골공원 옆 송해길에서 17년 넘게 장사를 이어왔다. 식당 내부에서는 차돌박이 해장국, 닭곰탕, 돼지국밥 등을 6000~8000원에 판매하고, 가게 귀퉁이에선 테이크아웃 카페처럼 잔술만 따로 판매한다.대형 미용실 한쪽의 네일숍처럼, 일종의 '샵인샵' 형태다. 좌석이 있는 안쪽 가게 사장과 잔술집 사장도 다르다. 전씨는 잔술집의 사장으로, 월 50만원가량의 월세를 내고 가게를 꾸리고 있다.

이날 찾은 부자촌에선 조용필의 '모나리자'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2평 남짓한 좁은 공간서 이 가게 주인인 전명연(72) 씨가 손님들에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전씨는 "노인 연금 30만원을 받아 떳떳하게 술 마실 수 있는 곳은 이 동네에서 여기가 유일하다"며 "경제적으로 어려우신 분들은 무료 급식소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여기 오신다. 여기 앉아 있으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종로3가역에서 나와 탑골공원 방향으로 걷다 보니 무료급식소에서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기다리는 어르신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사진=성진우 기자
부자촌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르신이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혼술하는 사람부터 동년배 친구들과 찾아온 사람도 있다. 이들에겐 1000원의 가치도 제각기 달랐다. 1000원에 1시간 동안 술을 마시는 이가 있는가 하면, 1분 만에 2000원어치 술을 들이켠 이도 있었다. 이날 만난 '단골' 정상길(78) 씨는 자신을 "소싯적 자동차 회사에서 개발 팀장으로 일했던 수출 역군"으로 소개했다. 정씨는 "다 옛날 일이고, 이젠 몸이 안 좋아 산 다니기도 힘들다"고 토로했다. 이어 "프랑스의 나폴레옹 코냑처럼 소위 '이순신 코냑'은 막걸리 한 잔 아니겠냐"며 매일 부자촌을 들른다고 전했다.

막걸리 두 잔을 1분도 안 돼 연거푸 마시고 급하게 자리를 뜨는 손님도 있었다. 인근 지역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강인구(53) 씨다. 그는 "지나가다가 목이 마르면 들러 한두 잔 먹고 간다. 더 먹으면 일을 못 한다"며 너스레를 떨고 다시 자신의 업장으로 돌아갔다.

정씨는 자리를 뜨면서 사장에게 1000원을 더 건네더니 취재진의 손에 삶은 계란 1알을 쥐여줬다. 이어 "기자 양반, 잘 모르시겠지만 여기 문화는 이래"라면서 웃었다.

'잔술 판매 허용' 국무회의 의결, 노포 상인 반응 "글쎄"

부자촌의 사장 전 씨는 매일 오전 7시까지 이곳으로 출근한다. /사진=성진우 기자
부자촌의 하루 매출은 5만원 남짓이다. 전씨는 4년 전부터 이곳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전씨는 출근 인파를 피해 매일 새벽 녹번동에서 첫차를 타고 출발한다. 그는 "돈 벌 생각이면 잔술 장사는 못한다"고 강조했다. 저녁 6시까지 장사하며 손님이 많이 왔다고 생각한 날도 10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그는 "그저 이곳을 찾는 노인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술을 대접하는 것이 보람"이라며 "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노인들이 서로 술을 사주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일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도 최근 입소문을 타 주말엔 젊은 사람들도 더러 찾는다"고 덧붙였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3월 식당, 술집에서 잔술 판매를 허용하는 내용의 '주류 면허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고, 이달 21일 국무회의에서 해당 개정안이 의결됐다. 이르면 이번 주부터 잔술 판매가 허용된다. 기존의 주세법으로는 주류를 빈 용기에 잔술 판매하는 건 금지된 행위라 부자촌과 같은 경우는 불법으로 볼 소지가 있었다.

전씨와 같이 인근 자영업자들도 잔술 판매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근처 한 가게 상인은 "잔술을 팔면 인건비밖에 못 받는다"며 "테이블 회전율도 떨어질 것"이라 지적했다.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공급자 입장에서 잔술 판매가 불편할 순 있어도 법이 시행되면서 소비자들의 수요가 생겨나기 시작하면 술을 소분해 판매하는 식당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다만 지금처럼 술 한잔에 비싼 가격을 매길 수 있는 위스키, 고량주 등 고급 주류 중심으로 잔술 판매가 더 확대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영리/성진우 한경닷컴 기자 smart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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