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탤지어'가 자본이 된 시대, 진정한 그리움은 무엇인가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일민미술관에서 6월 23일까지
일민미술관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전시에 박민하 작가의 '타임 패러독스'(오른쪽) 이유성 작가의 '약사여래입상' 등이 전시돼 있다. /일민미술관 제공
‘노스탤지어(향수)’는 때때로 현재를 지배한다. 기억은 소중한 자산이 되고, 옛것을 정감있게 그리워하도록 해주면 큰 돈이 된다. 아이돌 그룹이 복고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뉴트로(New+Retro)’ 콘셉트를 정체성으로 내세우고, 정치인이 과거 좋았던 시절을 거듭 회고하는 전략을 취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사람은 정작 경험하거나 소유해보지 못했으면서도, 옛 시대를 현실보다 친밀하게 받아들이곤 한다.

미국의 문화비평가 그래프톤 태너는 ‘영원주의(Foreverism)’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노스탤지어가 지배하는 세상을 설명한다. 기록과 저장을 위해 개발한 기술이 단순히 보존을 넘어 어떤 과거도 종결되지 않는 영속된 상태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나가 버린 시간에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일민미술관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전시에 전다화 작가의 '나 같은 여자'(맨 오른쪽) 등이 걸려 있다. /일민미술관 제공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은 영원주의를 미술에 끌어들여 작가들과 함께 우리 삶과 동시대미술에서 보이는 영원주의의 잔존물을 통찰한다.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는 일민미술관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기획전시다. 정연두, 박민하 등 한국 작가부터 영국의 스티브 비숍, 홍콩의 정 말러 등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동시대미술 작가 12명(팀)의 회화, 조각, 시청각 이미지를 통해 의 속성에 의문을 던지고, 영속성에 갇힌 시간 바깥을 상상해보자는 제안이다.

21세기 현대미술 역시 지난 세기 축적해 온 역사와 여러 방법론을 재인용하거나 재해석하는 데 열중하며 시간성이란 개념이 옅어졌기 때문이다. 박선호 일민미술관 퍼블리시스트는 “영원주의 개념 속에서 시간이 반복되기만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현실이 의미가 있는 걸까에 대한 질문”이라며 “현대 미술 작가들은 현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동시대성을 다뤄보는 웜톤의 전시를 꾸며 봤다”고 말했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1전시장 전경. /일민미술관 제공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대다수가 30~40대로 디지털 기술·매체 발전에 따라 누구보다 노스탤지어에 물들어 왔던 사람들이다. 전시에선 이들이 저마다 색다르게 그리움을 감각하는 방식을 제시하면서 기억을 비틀어보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인터넷에서 ‘밈(meme)’으로 유행한 ‘저주받은 이미지’를 회화로 변환한 ‘기계 속 유령’ 연작의 최근작 ‘나 같은 여자’를 선보인 전다화가 대표적이다. 200호 대형 캔버스에 육중한 몸집을 가진 새와 지푸라기가 나뒹구는 지저분한 화장실을 자세히 묘사한 기괴한 그림을 내놨다.2016년 허리케인을 피해 공중화장실에 숨어든 황새를 촬영한 기록을 인터넷으로 접한 것이다. 1990년대 태어난 작가는 사실 옛 시대를 겪어본 경험이 없다. 미국도 작년에서야 처음 가봤다. “전 내면의 풍경이 거의 없다. 텅 비어 있어서 막연히 무언가 떠밀려 오길 기대하며 시간을 낭비하곤 했다”면서 “내가 주운 건 대개 잡동사니와 쓰레기, 잔인한 농담, 출처 불명의 소문, 그리고 이미지들이다. 꼭 진짜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작가는 우리가 떠올리는 노스탤지어가 내면이 아닌 어쩌면 인터넷 바다에서 얻은 것에 불과할 수 있단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일민미술관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전시에 정연두 작가의 '내 사랑 지니'가 상영되는 모습. /일민미술관 제공
정연두의 ‘와일드 구스 체이스’는 일본 미토시를 배경으로 찍은 8000장의 사진 중 1500장을 골라 빠른 템포의 재즈곡을 붙여 슬라이드 형식으로 제작한 영상 작품이다. 사진은 일본인 맹인 사진가인 시라토리 겐지가 찍었다. ‘부질없는 시도’를 뜻하는 작품 제목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전맹 사진가가 현실을 담는 사진을 찍은 아이러니한 상황 자체가 기억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작가가 20여 년째 꾸준히 진행하는 작품인 ‘내 사랑 지니’는 서울, 도쿄, 베이징 등 여러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이를 기록했다. 노동자였다가 춤추는 댄서로 의상과 배경이 바뀌는 등 청년들의 현실과 꿈의 모습을 담아냈다. 자신의 꿈에 대한 그리움이 현실에 가로막혀 닿을 수 없는 공간이란 점이 영원주의를 다루는 전시와 어울린다.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전시가 열리는 일민미술관 3전시장 전경. /일민미술관 제공
전시에선 시청각 이미지를 혼합한 결과로 만들어진 다양한 서사와 감정, 정체성 변화를 면밀히 탐구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다만 영원주의라는 개념이 낯설고 1~3층에 걸쳐 마련된 작품들이 저마다 제각각이라 전시를 보는 내내 깊은 고민을 거듭할 필요는 있다. 전시 기간 동안 그래프톤 태너는 <영원주의>가 번역돼 국내 출간되고, 미술관에서 이 단행본을 다루는 연계 프로그램을 개최해 다소 막연한 전시에 이해를 도울 예정이다. 전시는 6월23일까지.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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