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은 아름답고 큰 차이를 만든다

[arte] 조원경의 책 경제 그리고 삶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척 안지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야
사소함이란 단어만큼 중의적인 게 있을까? 몇 가지 대화를 떠 올려 본다. 아 그 양반은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는 분이었어.(섬세함) 사소한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디테일)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말고 큰 그림을 그리세요.(잔챙이)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그래.(쓸데없는 것)

이처럼 우리말의 사소함이란 단어는 문맥에 따라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누구에게는 사소하지만 누구에게는 너무 중요할 수 있다. 사소함을 이야기 하는데 이토록 무거운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소설(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있다니 깜짝 놀랐다.여기 아일랜드의 평범한 남성이 있다. 그의 이름은 펄롱이다. 40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우리네 삶에 깃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통찰을 통해 정의(正義)의 편에 서기로 한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은 사소한 것들에 대한 감사의 집합체이다. 목재와 석탄을 팔며 삶을 고단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펄롱의 입장에서 그의 인생을 살아가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미혼모 어머니와 자신을 품어주고 사랑을 전해준 사람들. 철자법 시험을 잘 본 어린 펄롱을 자랑스러워하던 눈빛, 구두끈을 묶어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던 손길…”

그는 어려울 때마다 고인(故人)이 되었지만 오갈 데 없던 가련한 자신과 어머니를 머물게 해준 ‘미시즈 윌슨’을 떠올린다. 그는 그녀의 날마다 보여준 친절이나 그를 가르치고 격려한 그녀의 미소가, 그녀가 전해준 말이나 행동으로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 이 모든 게 합해져서 자신의 삶을 이루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어찌 보면 삶에서 아주 나약하다. 정의를 보더라도 척지지 말라는 조언을 받아들이고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에 눈감는다. 행여 그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낭패를 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내면의 동요와 불안정으로 용기가 없다.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표지
이야기는 경제 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1985년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펄롱은 야무지고 현실적인 아내와 다섯 딸과 살아가는 건실한 가장이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트럭으로 땔감 배달을 하고 캄캄한 밤에 귀가하는 빠듯한 삶을 반복한다. 자칫 한 눈 팔다간 실업과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까 위태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세상이다.

펄롱은 온기가 궁한 집 앞에 슬그머니 장작을 놓아주고, 딱한 아이들에게 선뜻 잔돈을 쥐어주는 사람이다. 문득 그를 보며 내 어린 시절 부모님을 생각해 본다.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며 상부상조하는 균형 있는 삶을 사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기쁨을 누린 내 부모 세대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사진 제공=베를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남과 자신 모두에게 성실하고자 노력하는 펄롱은 어느 날 뜻밖의 상황과 마주한다. 아일랜드 곳곳에선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 10대 미혼모 같은 여성을 몰아넣고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막달레나 세탁소’가 운영되었다. 이는 가톨릭 수녀들이 운영하는 교화시설이다. 펄롱이 수녀원에 땔감 배달을 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끔찍한 실태를 보고 만다.10대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그가 갓난아기를 빼앗기고 밤새 추운 석탄광에 갇혀 있던 어린 미혼모를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소녀의 처지가 남일 같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소녀를 구하는 일은 수녀원의 악덕을 폭로하는 일이다. 평화로운 크리스마스 시즌에 펄롱은 일상의 권력을 틀어쥔 가톨릭과 척지는 일을 용기 있게 해야 할까. 수녀들이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는 딸들이 행여 불이익을 받는다면 큰 일 아닌가? 괜한 짓으로 단란한 가정을 깨뜨렸다는 아내의 원망을 견딜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책의 몇 대목을 읽으며 그의 심경 변화를 바라본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사진 제공=베를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p.24)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p.44)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p.64~65)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해, 빌. 그런데 내가 듣기로 저기 수녀원 그 양반하고 충돌이 있었다며?”
잔돈을 받아 든 펄롱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시선은 걸레받이 쪽으로 떨어져 걸레받이를 따라 방구석까지 갔다.
“충돌이라고 할 건 아닌데, 네, 아침에 거기 잠깐 있었어요.”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적을 가까이 두라고들 하지. 사나운 개를 곁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고. 잘 알겠지만.”( p.105)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p.119)

펄롱은 수녀원의 광문을 열고 소녀(세라)와 함께 집으로 향한다. 그의 가슴은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으로 가득차 올랐다. 소설은 펄롱과 세라가 집으로 들어가기 전, 갈등이 현실화되기 직전에 멈춘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중략)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가는 펄롱의 가슴 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문득 이웃 대부분이 수녀들과 한통속인 동네에서 수녀원에 반기를 둔 펄롱은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작은 용기도 없다. 선의가 내팽겨지는 아픔을 겪지 않고, 순수한 영혼의 마디가 꺾이지 않고, 내적 평화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을까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아닐까. 돈, 권력, 명예란 허울로 그저 좋은 게 좋다는 그런 삶이 우리 앞에 ‘사소함’이란 단어로 휴지통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때로는 누군가의 사소함이 쌓여 우리를 용기 있는 자로 만들고 더 나은 사회와 지구촌을 건설하게 하는 힘이 된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제작과 주연은 맡은 배우 킬리언 머피
비즈니스를 하는데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서는 안 되나 기업은 고객의 사소한 서운함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면 어떤 사소한 것을 중요시해야 하는 지를 기업 경영에서 간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창조적 파괴란 혁신 경영을 이야기 할 때 많은 이들은 거창한 것을 생각하기도 한다. 기존의 틀을 완전히 부숴버리고 알에서 태어나는 천지개벽 장면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혁신이 디테일과 작은 생각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어떤 생각이 드나?

1917년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을 기억하나? 오래 전이지만 실로 선풍적인 충격을 불러온 뒤샹의 작품은 흔한 소변기를 떼어내서 거기다 ‘R. Mutt 1917’이라고 쓴 게 전부였다. 작가는 이 예술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변기 본래의 기능적 쓸모가 여기서 벗어나 실질적인 예술품으로 승화시키는 미세하고 미묘한 차이에 주목해 보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 작은 섬세함이 물건과 예술의 격차를 만들게 했다. 사소한 선구적 시각이 때로는 큰 차이를 낳는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고객을 감동시키는 경영 역시 일상 속에 흩어져 있는 작은 이야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마르셀 뒤샹 <샘> (1917)
미국 컴퓨터 과학자 래리 테슬러(Larry Tesler)의 ‘복잡성 보존의 법칙’을 생각해 보자. 2020년 작고한 그는 제록스에서 일하면서 개인용 컴퓨터(PC)의 대중화를 이끈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사용자 친화적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모든 응용 프로그램에는 제거하거나 숨길 수 없는 고유한 복잡성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는 제품 개발 과정에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테슬러의 정신은 아래의 말로도 치환이 가능하다.

“모든 제품이나 서비스가 갖는 복잡함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만약 기업이 복잡함을 더 책임지게 되면 그만큼 고객이 간편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와 반대로 기업이 복잡함을 짊어지지 않고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판단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필요 이상의 복잡함은 고객의 몫이 된다.”
그래서였나?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게 단순함은 종교이자 무기였다. 그는 제품개발, 디자인, 조직운영에 이르기까지 극도의 단순함을 지향했다. 복잡함이 가득차서 넘치는 세계에서 누군가가 단순한 것을 제공할 경우에 그 차이가 확연하게 두드러진다고 믿고 디테일 경영에 나섰다. 그의 철학은 심플함이 복잡함을 이긴다는 말로 다가온다. 모든 발명품은 소비자의 불편을 먹고 심플하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다. 소비자의 불편을 생산자의 고민으로 단순하게 해야 고객만족의 혁신이 발생한다.

아우디에 냄새 전담 후각 팀이 별도로 있는 것을 아는가?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플라스틱 부품이나, 고약한 냄새의 가죽시트, 퀴퀴한 냄새의 바닥 매트가 아우디 차량에는 없다. 아우디는 건강에 해로운 배기가스를 배출할 수 있는 물질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다. 전담팀이 자동차 500여 개의 부품을 하나하나 코로 냄새를 직접 맡으며 확인해야 한다. 완성된 이우디 차량은 시각적, 촉각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후각적으로도 소비자를 만족해야 한다.
제임스 다이슨(James Dyson)이 영국의 스티브 잡스라고 불리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다이슨 청소기를 사용하는 이유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이슨을 품질 디테일 경영의 진수를 보여주는 기업으로 인식한다. 제임스 다이슨은 1993년 자신의 이름을 딴 다이슨이란 전자제품 기업을 세웠다. 그는 품질 디테일로 고객 감동을 이끌어 내는데 전력을 쏟았다. 소비자가 느낄 사소함에 많은 자원을 투입해 고객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했다는 말이다. 세계 최초로 다이슨이 고안한 날개 없는 선풍기나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가 이를 말해준다. 소비자는 제품을 사용할 때 교환이나 닦기를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라 생각한다. 사소할 것 같지만 이 중요한 것을 생각한 노고가 품질 디테일 경영의 대명사로 다이슨을 생각하게 한다.
다이슨의 창업자이자 수석 엔지니어인 제임스 다이슨(James Dyson)이 '다이슨 슈퍼소닉 뉴럴 헤어드라이어(Dyson Supersonic Nural™ hair dryer)'를 소개하고 있다. /뉴스1
널리 사용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에는 천사의 디테일한 손길이 여운으로 남아있다. 세계적인 브랜드 전문가 마틴 린드스트롬(Martin Lindstrom)이 말한 스몰데이터(Small data)란 책의 요점을 보면 사소함의 중요성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빅데이터보다 스몰데이터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빅데이터를 분석해 특정 패턴을 발견하고 트렌드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정량적 분석만으론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때 유용한 게 스몰데이터다. 스몰데이터는 빅데이터와 달리 고객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파악해 생성하는 데이터다. 언뜻 사소할지 모르는 행동에서 혁신의 단서를 찾아내고 브랜드의 가치 향상을 이끌 기지를 마련한다면 스몰데이터가 차이를 만든다고 할 수 있겠다.

제대로 된 지식과 사소함이 만나면 실마리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빅데이터와 스몰데이터를 잘 활용해 초개인화 시대에 정보를 최대한 세분화해 소비자 만족의 차별화를 꾀하는 게 경영의 우선순위임을 알게 된다. 결국 사소함을 대하는 디테일에 강해야 오래도록 시장에서 살아남는 명품이 만들어진다. 흔해 빠진 사소한 물건이 되어 잊힐 게 아니라 사소한 것을 간파하는 차이로 기업이 역량을 십분 발휘하면 고객만족, 비용절약, 안전관리 모두에 성공할 수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소녀를 위하는 펄롱의 마음처럼 위대하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아름답고 큰 차이를 만든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감독 팀 밀란트)이 올해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됐다. 연약한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과 불의에 맞서는 의지가 어우러진 이 이야기가 모든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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