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한의 연주 재현을 실패하고 나서야 원음 타령이 멈췄다

[arte] 코난의 맛있는 오디오
재난 문자 그리고 힐러리 한
아침부터 야단법석을 떨었다. 시청실 준비 때문에 고민이 많은 요즘 잠이 잘 오지 않는 날이 반복되던 요즘 아침부터 울린 재난 문자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약 세 시간 정도 잠을 자고 있던 와중이었고 그마저도 선잠이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건 이후 또 한 번의 재난 문자 안내였다. 오보였다는 문자에 망연자실했다. 잠이 모라란 덕분에 모골이 송연한 상태로 하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출근길은 마치 대피하는 듯한 기분이 되었지만 시청실에 들어서자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지하에 마련된 시청실은 이제 막 첫 삽을 떴지만 눈앞에 뭔가 상상 속으로 그리는 풍경이 떠오르곤 했다. 가끔은 이렇게 싹 비워낸 공간도 좋다. 마치 텅 빈 캔버스였을 때 가장 열망이 솟아나오고 이후 그림을 그려나가면 이젠 필사적이 되기 때문에 가장 순수한 열정을 만끽할 수 있을 땐 텅 빈 준비 시간일 테다. 그리고 이런 시간은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는 귀한 시간이다.
코난의 시청실
이런 저런 일들을 빠르게 해치운 이후 저녁 땅거미가 지기 전에 시청실을 나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예술의전당이다. 일주일 전부터 기다려왔던 공연 또한 오늘이었다. 다시 또 대피를 하는 듯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주인공은 힐러리 한과 안드레아스 헤플리거. 세기의 바이올린 주자와 피아니스트가 함께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두 곡을 연주하기고 한 날이다. 힐러리 한의 음악은 익숙하지만 헤플리거는 처음이다. 과연 어떤 조화를 보여줄까?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본 이래 아마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나 한다. 중앙에서 두 음악인의 연주를 또렷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피아노가 미동도 없이 놓여 있고 이어 어느 샌가 두 연주자가 나와 연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찰나의 시간처럼 음악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예술의전당 음악당 자체의 사운드 특성도 있었지만 힐러리 한의 바이올린 소리가 또렷하게 잘 들렸다. 어느 한 악절도 뭉개지거나 옅게 흩어지지 않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톤이 형성되었다. 물론 헤플리거의 피아노 또한 뒤로 숨지 않고 열정적으로 호흡을 나눴다.

어떤 면에서 파격적인 연주였다. 바흐 연주를 주로 많이 들어왔던 터라 과연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에선 어떤 연주를 보여줄지 좀처럼 예상을 할 수 없었지만 빠르게 연주로 몰입할 수 있었다. 잔잔하고 차분하게 심연으로 들어갔다가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템포와 강약 대비로 다이내믹스를 살려냈다. 앵콜로 연주한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헤플리거가 연주한 사랑의 죽음 그리고 소메이 사토의 ‘Bifu’에 이르기까지 전혀 긴장하지 않고 공연을 술술 풀어나가는 모습에선 확실히 정상급에 오른 뮤지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완전히 끝나고 일어서 콘서트홀을 빠져나오니 진풍경이 펼쳐졌다. 수십 미터 길이를 수백 명이 길게 이어서 사인을 기다리는 모습. 힐러리 한의 인기를 실감한 순간이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서둘러 대피길에 오르느라 아무런 음반도 가져가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하면서 어두워진 예술의 전당 앞을 거닐며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 날 공연을 복기하자니 아침의 그 거칠고 어수선했던 마음은 이내 따뜻해졌다. 힐러리 한에 투영된 베토벤은 베토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고 그녀에게 얼음공주라는 애칭은 이제 착각처럼 생각되었다.
그 날의 감동은 다음날 아침 피곤함에 늦게 눈을 뜨고도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바이올린 보잉의 속도와 힘, 현과 활이 마찰하는 강도와 강, 약 세기 표현, 잔향의 길이까지. 그리고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를 돌아 나에게 왔는지 모를 특유의 울림은 그냥 앰비언스라고 하기엔 복잡다단한 음향적 특성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했다. 이전에 음반에서 들었던 것과 확연한 차이는 단지 베토벤이라는 사실과 헤플리거와의 협연에서만 얻어진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옷을 추스러 입었다기보단 그냥 몸을 옷에 끼워넣는 둥 마는 둥 하고 시청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아직 제대로 시스템 세팅을 끝낸 상황도 아니었건만 어젯밤의 소리를 조금이나마 재현해보고 싶었다. 스피커는 이미 세팅해놓은 윌슨오디오의 사샤, MSB DAC를 프리 겸용으로 활용하고 웨이버사 시스템즈의 Wcore와 Wstreamer를 연결했다. 그리고 힐러리 한의 바흐부터 가지고 있던 음원을 차례로 재생해보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어제의 소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스피커 토인을 바꾸어보고 케이블을 바꾸고, 음원이 아닌 SACD로 들어보아도 어제의 그 아련한 감흥은 되돌릴 수 없었다.결국 나의 노력은 헛헛하게 마무리되었고 왜 그 소리에 나는 감흥을 얻었으며 왜 이 값비싼 오디오로는 조금도 비슷한 소리를 내지 못할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음향적으로 결국 실연과 녹음의 차이는 마스터링 등 포스트 프로덕션 그리고 무엇보다 연주 공간의 차이라는 뻔한 추리가 가능하다.

게다가 재난 문자로 시작했던 그 하루의 첫 단추와 사무실에서의 시간들, 허겁지겁 입장했던 콘서트홀의 공기와 공간의 울림이 있었다. 그리고 신선했던 베토벤 연주와 모든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향하던 봄날의 공기들. 이 모든 것이 그 날 연주는 물론 음향에 대한 기억 속에 함께 불규칙적으로 엉켜 있었다.

몇 년 전 어느 기업에서 한 달 동안 몇 차례 강의를 나간 적이 있다. 물론 음향, 오디오에 관한 내용을 주제로 했는데 어느 분이 뜬금없이 질문을 날렸다.‘원음’이란 어떤 걸까요?

나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스튜디오에서 들었을 때의 그 소리라고. 하지만 사실 원음이란 연주가 행해진 후 청취자에게 저마다 다른 소리로 인지되어 다르게 해석된다. 그 날의 힐러리 한과 헤플리거의 연주 또한 그렇다. 그 연주를 들은 나만의 기억 속 소리가 원음일까? 그 또한 그 날의 일정과 기분 그리고 무엇보다 재난 문자와 섞여서 나만의 특별한 그 무엇으로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원음 타령은 이제 그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 맑게 빈 캔버스에 음악을 담으면 그만이다. 그 때 비로소 하이파이 오디오에서 원음 따위를 찾는 재난은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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