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시보다 더 베일에 싸인 작가…라피노, 서울서 아시아 첫 개인전

글래드스톤 '스페셜K'展

꿈을 잃은 청년들 공허함 그려
열쇠구멍으로 보는 듯한 구도
미술계 넘어 패션업계도 관심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화가가 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프랑스 태생이라는 것과 데이비드 라피노로 불린다는 것뿐이다. 그가 소속된 미국의 갤러리조차 라피노와 대면한 적이 없다고 한다. 정체불명의 영국 화가 뱅크시와 비슷하지만 라피노는 자신이 누군지 힌트조차 주지 않기 때문에 조금 더 철저한 ‘익명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베일에 싸인 라피노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서울 삼성동 글래드스톤 갤러리의 ‘스페셜 K’다. 전시회에선 작품 16점을 접할 수 있다. 라피노는 202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한 첫 번째 개인전에서 유럽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미술계를 넘어 음악, 패션업계까지 그에게 협업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내놓은 그림마다 ‘완판’됐다. 이번 전시에 걸린 작품들도 공개와 동시에 대부분 주인을 찾았다.라피노는 요즘 젊은이들을 그린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청년들이 꿈을 포기하거나 비뚤어지는 과정을 그림으로 묘사한다(사진). 청년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린다. 청년들은 공허한 표정을 짓는다. 눈빛에 초점이 없다. “외설적이고 퇴폐적”이란 평가를 받는 이유지만 한편으로는 “외설이 아니라 이 시대의 얼굴”이라고 하는 해석도 많다.

라피노의 작품 대부분은 굴곡된 렌즈로 세계를 보는 인상이다. 열쇠 구멍으로 몰래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 배경이다. 미술계에서는 라피노가 굴곡진 구도를 이용해 우리 모두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는 이야기를 말한다고 분석한다.

이번 전시에 걸린 작품은 그가 작년과 올해 그린 것들이다. 1년 사이에 변한 그의 작업 방식을 들여다보는 것도 감상 포인트다. 지난해 작품에 들어 있는 인물과 풍경은 평면에 가까웠지만, 올 들어선 광각렌즈를 들이댄 것처럼 왜곡이 심하다. 형식은 만화와 비슷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하나같이 묵직하다. 사회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소속된 사람과 풍경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것. 전시는 2024년 1월 13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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