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녀가 '문'이 된 이 전시, 목숨 건 예술가의 한평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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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시간'의 행위예술 대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영국 런던 왕립예술 아카데미 전시장 입구. 한 쌍의 남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마주보고 서 있다. 이 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곳에서 발가벗은 채로 서 있는 것일까.
영국 왕립아카데미 첫 여성 단독 회고전
식욕 수면욕 참는 등 40년간 자학적 '벼랑 끝 예술'
군대식 훈육과 엄한 부모 아래 어린 시절 트라우마
죽음 목격한 경험 등 삶의 고통과 고뇌 치유하는 과정
이 둘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술관 입구'다. 문 안쪽에서 이뤄지는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미술관을 찾은 관객들은 발가벗은 두 남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만 한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당황하며 최대한 이들과 닿지 않으려 몸을 비트는 등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한다. 조금만 방심해도 이들의 발을 밟거나,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특이하고, 또 기괴한 전시를 연 주인공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다. 그는 지난달 23일부터 영국 왕립예술아카데미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고 있다. 연일 전시장에는 영국 시민들 뿐만 아닌 해외 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외설적 입구 퍼포먼스'로만 소개되기에는 이 전시가 가진 미술사적 의미는 크다. 영국 왕립아카데미 역사 이래 여성이 단독 전시를 선보이는 건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최초다. 지난 2020년 개최 발표 자체로도 큰 이슈가 됐던 이번 전시는 코로나로 인해 그 해 한 번, 2021년에 한 번, 총 두 번이나 연기됐다. 그가 선보이는 작품들은 전시장 입구에 선 남녀처럼 인간들 사이 서로 살이 닿고, 보고, 또 만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행위예술의 대모'라고 불릴 만큼 행위예술이라는 장르의 새 지평을 연 인물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자신의 신체에 스스로 고통을 주는 '자학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칼로 손가락 사이를 찌르고, 오랜 기간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총을 겨누게 하는 등 그는 항상 신체적인 위험을 감수하며 행위예술을 한다. 이번 회고전을 통해 그는 40년간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며 펼쳐 온 그만의 예술 발자취를 풀어냈다.이번 회고전에도 영상으로 전시된 그의 대표작은 2010년 뉴욕현대미술관서 선보인 '예술가가 여기 있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아브라모비치가 의자에 앉고, 큰 책상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에 지나는 관람객 누구나 앉아 그와 눈을 맞추는 행위예술 공연이다.
아브라모비치는 행위가 이어지는 기간 동안 맞은편의 관객이 무슨 행동을 보이던 간에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을 '예술의 규칙'으로 삼았다. 전 세계에서 구름 인파를 몰고 왔던 이 화제의 공연은 당시 1545명의 관객들을 맞았다. 79일간 이어졌던 그의 행위예술은 아브라모비치의 전 연인 울라이가 맞은편에 앉자 그가 눈물을 보이며 손을 뻗고 '규칙을 어기며' 종료됐다.아브라모비치가 구상한 이번 전시의 포인트는 관객이 단순히 작품을 보는 대신 몸으로 체험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관으로 넘어가면 관객들은 뜨개질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양초를 들고, 우유를 마시는 듯한 그의 모습을 비디오를 통해 볼 수 있다. 바로 앞에서 실제 그가 움직이는 것처럼 표현됐다. 비디오 속 그는 해골들 아래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기도 하다. 비디오 바로 밑에서는 다른 퍼포먼스 공연자가 해골 밑에서 아브라모비치와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한 쪽의 벽에는 십자가 모양의 비디오 틀이 전시됐다. 이곳에 비춰진 아브라모비치는 모든 화면에서 비명소리를 지르고 있다. 이 작품은 아브라모비치가 구상한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공연 버전이다. 뿐만 아니라 관람객들은 두통이 느껴질 정도로 뜨겁고 밝은 조명이 켜진 복도를 지나가야 하고, 벌거벗은 여성 공연자가 튀어나온 안장 위에 앉아 30분 동안이나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걸 바라봐야 하기도 한다. 그만큼 이 전시는 곳곳에 '불편함'과 그녀가 느끼고 표현해 온 공포가 곳곳에 묻어 있다.
그가 이런 '자학의 예술'을 해 온 데는 그의 유년 시절 기억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46년 태어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군대식 훈육과 엄격한 생활을 강요한 부모에게서 자라났다. 그는 어머니의 감시 아래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게 아브라모비치는 일상의 도피처로 예술을 선택했다. 우울한 유년기 속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내란, 학살과 전쟁을 그대로 겪은 아브라모비치는 죽음의 역사를 목격한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폭력과 죽음을 주제로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예술세계는 점점 자학과 위험을 수반하는 극단적 행위예술로 발전해갔다.그는 단순히 자신이 고통받는 장면을 관객이 '목격'하거나 '관람'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달함으로써, 관객이 예술의 한 부분에 참여하는 참여자가 되도록 만든다. 그는 과거 인터뷰를 통해 "행위예술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또 관객과의 간극을 표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아브라모비치는 현재 병상에서 폐색전증을 치료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회고전에서는 그녀의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녀는 예술학교 제자들에게 자신의 공연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기회를 넘겨줬다. 전시를 관람한 관람객들 중 대다수는 왕립아카데미의 3년간의 노력에 혀를 내둘렀다. "아티스트가 직접 공연에 참여하지 않고도 그 에너지를 그대로 전달받았을 만큼 치밀한 노력이 보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걸고 예술을 한 작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인생을 돌아보는 회고전은 올해 12월 31일까지 영국 왕립아카데미에서 만날 수 있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