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청준의 일기장이 감춘 단 하나의 이름

[arte] 인터뷰

펴낸 이윤옥 평론가

생전 "평전을 써달라" 부탁 지키려
10년 넘게 초고·편지·일기 등 살펴보고
주변인물 인터뷰해 평론 집필

소설 속 여성 인물 원형 밝히고
클래식 애호가 면모 찾아내는 등
'우리가 모르던 이청준의 얼굴' 보여줘

올해는 이청준 15주기
"이 선생을 떠나보내는 진혼곡 같은 책"
<이청준 평전>을 집필한 이윤옥 문학평론가가 9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집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최혁 기자
그가 감췄던 건 딱 한 여자의 이름이었다.

<당신들의 천국> 등을 쓴 한국 대표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이윤옥 문학평론가(65·사진)에게 자신의 평전을 써달라고 부탁하며 편지와 일기장, 소설 초고를 전부 내줬다. 일기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심사에서 탈락한 뒤 분노하며 적은 저속한 욕설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가 일기장에서 오려낸 건 결혼 전 젊은 날 연심을 품었던 현영민 씨의 이름뿐이었다. 평전은 그 이름을 복원했다. 이 평론가는 현씨를 비롯해 이청준 소설 속 여성인물의 원형이 된 '이청준의 여성들'을 평전을 통해 밝혀냈다. 현씨를 두 차례 인터뷰해 그 내용을 싣기도 했다.

"내 합리화를 벗겨 민낯을 보여달라"

최근 <이청준 평전>(문학과지성사)을 펴낸 이윤옥 문학평론가는 9일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간 이청준 문학에서 가장 말해지지 않았던 부분이 여성인물들인데, 관련 연구의 실마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며 "이번 평전의 목표는 이청준 문학 읽기에 '두께'를 더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 가지 걱정이 됐던 건 이청준 선생 아내분의 반응이었어요. 그런데 워낙 담대한 분이세요. 평전을 다 읽고서 좋았다고, '이 은혜를 다 어떻게 갚지요' 하고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그럼 됐구나, 싶었죠."
&lt;당신들의 천국&gt; 등을 쓴 소설가 이청준(1939~2008). 한경DB
올해는 이청준 작가의 15주기다. 이 작가는 1958년 고 1때 '학원'지에 단편 '닭쌈'을 발표하고 1965년 단편 '퇴원'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첫 장편 <조율사>, 대표작 <당신들의 천국>,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진 '서편제'와 '벌레 이야기'(영화 제목은 '밀양') 등 장편 17편과 중단편 155편을 발표했다. 유일한 희곡 '제3의 신'까지 더하면 200자 원고지 5만 매, 170편이 넘는 광활한 작품세계를 펼쳤다.

이 평론가가 평전을 쓰게 된 건 이 작가의 생전 부탁 때문이었다. 모임에서 1년에 서너 차례 봤을 뿐 사적인 친분이 없던 그에게 평전을 맡긴 건 가감없고 객관적인 기록을 원해서였을 것이다. 이청준 작가는 죽기 3~4개월 전 이 평론가에게 "소설가는 작품으로 교묘히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 부디 네 상상력이 내 상상력을 이겨서 내가 꾀한 모든 자기합리화를 벗겨 내 맨얼굴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 평론가는 한국 현대 문학사의 거목이었던 고인의 삶을 다시 쓰기 위해 10년 넘도록 자료를 분석하고 주변인물을 찾아가 일화를 수집했다. 이청준 작가의 고향인 전남 장흥은 물론 순천, 광주광역시 등을 헤맸다. 2년 전에는 겨우 완성한 초고를 전부 버리고 새로 쓰기도 했다. "다 적고 보니 가독성이 너무 떨어지더라고요. 10개월에 걸쳐 원고를 다시 쓰며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나'가 등장한다는 거예요. 결국 이건 내 관점으로 해석한 이청준 선생의 이야기니까요. 1인칭으로 다시 썼죠. 이전까지 평전을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평전들을 많이 찾아 읽기도 했어요."

"나는 지금 소설가 이청준의 삶을 글로 다시 살아보려고 한다"고 선언하며 시작하는 평전은 이청준 작가가 자주 활용하던 격자소설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단편 '병신과 머저리', '매잡이' 등은 화자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이야기' 구조를 취한다.

그를 작가로 만든 건 썩은 게 자루였다

이 평론가는 마치 탐정처럼 인간 이청준의 궤적을 좇는다. 거장의 사소한 거짓말이나 그가 품었던 세속적인 욕망도 밝혀낸다. 예컨대 고인은 "신춘문예에 7번 낙방한 뒤 1965년 단편 '퇴원'으로 등단했다"고 말하곤 했는데, 실은 처음 응모한 작품이었다. "다른 사람들, 특히 글을 쓰는 후배들을 생각한 거짓말"이었을 거라고 그는 추측한다. 도시의 삶, 도시 여성에 대한 이청준의 열망을 분석한 부분도 눈에 띈다. 이 평론가는 "이 선생은 '작가가 거대한 사명의식에서 글을 쓴다는 건 다 거짓말'이라고 말한 적 있고, 자기 안의 욕망을 스스로 꿰뚫어본 사람"이라고 했다.

'가난한 수재'였던 이청준이 광주로 유학을 가면서 느꼈던 비애, 고등학생 시절 가정교사로 입주해 만난 부잣집 딸 현영민에 대한 연심과 좌절이 그에게 작가로서의 성공을 꿈꾸게 만들었다는 게 평전의 분석이다.

1954년 광주서중에 입학한 이청준 작가는 친척집에 의탁하게 되는데, 입학을 앞두고 4월 3일에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친척집에 가져갈 게를 잡았다. 그런데 친척집에 도착하고 보니 이동 중에 게가 부스러지고 깨져 친척은 썩은 게 자루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린다.

이청준 작가는 훗날 이 사건을 회고하며 "그 궁색스런 게 자루와 거기 함께 담겨 버려진 어머니의 정한은 그러나 두고두고 내 삶과 문학의 숨은 씨앗, 가냘프나마 그 발아와 생장력의 원천이 되어왔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이 순간이 얼마나 한스러웠는지 2007년 4월 3일 호암상 수상 소식을 들은 날 그는 일기에 "이날쯤-옛날 광주행 위해 어매와 게 잡던 날?"이라고 적었다. 53년 전의 일을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한 것이다.

평전은 이청준 작가의 새로운 얼굴들을 보여준다. 문학계의 거장인 그가 아내 남경자와 결혼 전 "나에게 비둘기가 되어주오" 하는 사랑일기를 남겼다는 대목에서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다. 그가 글쓰기에 몰두해 사느라 자신의 집 비밀번호조차 모른 채 지냈다는 사실, '서편제' 등 판소리 애호가이기 이전에 클래식 애호가였다는 사실도 평전을 통해 드러난 면모다.

거장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거침없던 평전은 단 한 번 "모르겠다"고 물러선다. 이청준 작가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심사에 탈락한 뒤 "(예술원은) 비인간적 OOO들 자리"라며 격분해놓고 이듬해 결국 예술원 회원이 된 대목에서다. 명예욕이나 돈 문제 등 이유를 추측할 뿐 판단을 유보한다.

"이청준은 독자의 삶을 바꾸는 소설가"

이 평론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청준의 작품을 따라 읽던 열혈 독자였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불문학을 가르쳤던 이 평론가는 "이청준 선생의 <별을 보여드립니다>를 읽지 않았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평론 등단작도 이청준 작가의 작품에 대한 것이었다. 이 작가가 보내준 소설 초고를 읽고 답장처럼 쓴 평론을 이 작가가 '현대문학'에 보내버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등단했다. 그는 2017년 총 34권으로 완간된 이청준 전집(문학과지성사)의 서지 비평을 맡기도 했다.

"잘 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두 걸음 전진하면 한 걸음 돌아보게 만드는데, 이 선생의 작품이 그렇죠.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않을까?' 자기 삶을 돌이켜보게 되니까요."

이 평론가는 "이 선생의 작품은 실제로 몇 사람의 삶을 바꿔놓았고, 대표적인 게 <당신들의 천국> 속 조백헌 소록도병원장의 모델이 된 조창원 원장"이라고 했다. 작품 속 조백헌은 전직 군의관이자 현역 육군 대령으로, 나병 환자 병원의 병원장이다. 그는 실의에 빠진 환자들을 위해 간척 사업을 추진하지만, 환자들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섬은 '당신들의 천국'일 뿐이다.

이 평론가는 "조창원 원장을 만나 '작품을 읽고 기분이 어떠셨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며 "그는 소설을 읽은 뒤 '내가 당신이 쓴 대로 살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태백으로 갔다'고 답했다"고 회고했다. 조 원장은 탄광촌 진폐증 환자들을 위한 병원인 장성병원 규페센터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다 2018년 세상을 떠났다. 이 평론가는 "제대로 된 문학 작품은 그 독자의 삶의 방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튼다"고 말했다.

"이청준 선생을 한 마디로 요약해달라는 청을 받은 적이 있어요. 한참 고심 끝에 '모든 현상의 배면에 있는 본질을 보는 작가'라고 답했죠. 그분의 작품에는 개인이 오롯이 살아있으면서 사회를 말해요. 우리를 억압하는 폭력, 부, 이데올로기, 종교에 대해 말하는데 작품 속 개인이 오롯이 살아있죠. 그래서 거대 담론이 실종된 21세기에 읽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앞으로 이런 소설가는 못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이 평론가는 "이 책은 타계 15주기를 맞은 이청준 선생을 위한 진혼곡"이라고 했다. "그가 죽었다"로 시작해 이청준 작가의 묘비명으로 끝나는 책의 구조는 처음부터 구상해놓은 대로다.
표지의 초상화는 서용선 화백이 오로지 이 책만을 위해 그렸다. 이 평론가가 과거 서 화백에 대한 글을 쓴 인연으로 직접 부탁했고, 이청준 작가의 작품을 아끼던 서 화백이 흔쾌히 수락했다.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2014년 이중섭미술상 등을 받은 서 화백은 현재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 중인 ‘빨간 눈의 자화상’을 그린 그 작가다. ▶서용선 화백 관련 기사 이청준 작가가 완성된 평전을 봤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질문을 받은 이 평론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마음에 들어하실 지는 모르겠어요. 항상 존댓말을 하시는 분이니 '이 선생, 애썼네요' 하실 거 같아요. 비난도 칭찬도 쉽게 안 하는 분이셨으니까……"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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