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액밖에 몰라요"…칼 무뎌진 예산실 사무관 [관가 포커스]

기획재정부 예산실이 있는 정부세종청사 중앙동 5층 전경
기획재정부 예산실에 한때 근무했던 A국장은 최근 젊은 예산실 사무관들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깜짝 놀랐던 경험을 털어놨다. 그는 예산실 공무원은 불필요한 각 부처의 예산을 과감하게 삭감하는 ‘칼잡이’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본인의 경험을 살려 사무관들에게 당부했다. 실제로 과거엔 예산실 공무원들을 칼잡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사무관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칼잡이라는 별명을 처음 들어봤다는 사무관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A국장 설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확장재정 기조를 유지했던 문재인 정부 때 예산실에 입직한 사무관들이다. A국장은 “사무관들이 과감한 예산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 뿐”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본격적인 예산철을 앞두고 기재부 예산실은 각 부처로부터 제출받은 예산안에 대해 구조조정을 하느라 분주하다. 기재부는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이달 말 정부 예산안을 편성, 9월1일까지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특히 올해는 윤석열 대통령이 건전재정 기조를 거듭 강조하면서 각 부처 예산을 일제히 구조조정하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도 현금성 재정지출을 막아야 한다고 연일 강조하고 있다.

예산실은 이달 초 각 부처에 내년도 예산 요구안을 다시 제출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사실상 원점에서 예산 제출안을 살펴보라는 주문이었다. 각 부처가 이미 지난 5월 말 내년도 예산 요구안을 제출했는데, 한 차례 더 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각 부처마다 부랴부랴 추가 예산 삭감 작업에 나서 예산안을 다시 제출했다.

하지만 예산안 편성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이 예산실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 예산실 국장급 간부는 “각 부처 자체 사업 중에서도 투입 대비 효과를 내지 못하는 사업이 적지 않다”며 “수백만 원 규모의 소소한 사업까지도 일일이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예산실에서 근무하는 젊은 실무 사무관들은 이런 상황을 무척 낯설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각 국마다 예산을 삭감해야 할 사업을 제대로 발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후문도 들린다. 보수·진보 정부를 막론하고 건전재정 기조는 예산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신조였다는 것이 예산실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하지만 직전 문재인 정부 때만은 예외였다고 했다. 당시는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재정을 투입해 경기를 살리자는 분위기였다. 이뿐만 아니라 재정을 통해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대통령실의 입김도 강했다. 당시 한 대통령실 관계자는 ‘재정을 곳간에 쌓아두기만 하면 썩어버린다’는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각 부처에서 제출한 예산안을 기재부가 오히려 증액한 사례도 수두룩했다는 것이 예산실 관계자의 설명이다. 문재인 정부 때 예산실에서 근무했던 한 국장급 간부는 “예산실은 살을 발라내서 제대로 된 뼈대를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도 당시엔 오히려 불필요한 살을 붙였다”고 토로했다. 잇단 현금성 재정지출에도 예산실의 존재감은 미미했다.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지만,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2차 추가경정예산이 편성되는 등 경기 부양이 우선시됐다. 엄격한 건전재정을 다시 강조하기 시작한 건 사실상 올해가 처음이다. 이렇다 보니 문재인 정부 때 입직해 확장재정에 익숙해져 있는 실무 사무관들이 ‘예산 다이어트’에 제대로 적응을 못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예산실 간부는 “각 부처에서 제출한 예산 요구안을 효율성 있게 구조조정하는 것이 예산실의 역할”이라며 “확장재정에 익숙해져 있는 직원들이 하루빨리 건전재정 기조에 적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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