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에 헌신한 76세의 부흐빈더, 건반을 경쾌하게 내달렸다[리뷰]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 갖는 루돌프 부흐빈더
지난 1일 오후 7시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 로비. 이제 막 공연을 마친 연주자의 사인을 받기위해 10미터에 가까운 대기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주인공은 유럽에서 온 76세 노장 피아니스트. 그는 100분 간의 열연 탓에 붉게 상기된 얼굴로 관객을 맞이했다. 지쳐 보였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현존 최고의 베토벤 해석자로 불리는 루돌프 부흐빈더 이야기다. 그는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7일까지 총 7번의 공연을 통해 32개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연주한다. 세계 각지에서 이 작품을 연주해온 그는 이번 내한 공연이 60번째 전곡 투어였다. 이날은 그의 세번째 공연, 사흘 연속 연주하고 매일 사인회를 진행한 상태였다. 사인회는 '아티스트의 요청'에 의한 것. 연주자의 나이, 길고 험한 프로그램을 생각했을 때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공연기획사 빈체로 관계자는 "연주자의 강력한 요청에 따른 것"이라며 "관객과 직접 만나고 소통하면서 에너지를 많이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 사인회에서 힘을 얻은 탓일까. 이날 프로그램은 32개의 베토벤 피아노 소타타 중에서도 대곡들로 구성됐지만 그는 지치지 않고 에너지 넘치게 완주했다. △젊은 베토벤의 혁신성이 두드러지는 3번 △베토벤 초기 대곡으로 꼽히는 7번 △독특하게 2악장으로 구성된 19번 △베토벤이 직접 이름을 붙인 유일한 소나타 26번 '고별' △후기 소나타의 시작인 28번 등이 포함됐다.
부흐빈더의 베토벤은 가볍고 경쾌했다. 특히, 그는 불필요한 긴장없이 특유의 빠른 템포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직진했다. 낮은 음역을 타건할 때는 매우 굵고 강하게 연주했고, 높은 음역대에서는 한없이 레가토(음을 부드럽게 이어 연주)로 여린 소리를 들려줬다. 이러한 그의 연주스타일은 베토벤이 살던 시대의 포르테피아노(현대 피아노의 전신)의 소리를 연상케 했다. 포르테피아노는 지금보다 건반이 가볍고 음역대 별로 음색과 음량의 차이가 컸다.그는 악보와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특히, 표기된 악상기호를 최대한 살려냈다. 스포르찬도(그 음을 강하게 연주), 포르테시모(매우 강하게) 직후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 등. 한 프레이즈에서도 수차례 바뀌는 변화무쌍한 다이내믹을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물론 전체적으로 빠른 템포 때문인지, 종종 음이 빠지거나 희미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해석과 입체적인 음악에서 수십년에 걸친 그의 헌신이 충분히 와 닿았다.
마지막 곡을 마치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베토벤에 대한 그의 순정에 관객이 화답한 것. 이내 그는 앙코르를 연주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앙코르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번'. 또 베토벤이었다. 지난 사흘간 32개 소나타 중 절반을 연주했고, 며칠 뒤 나머지 절반을 마저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베토벤의 음악이 단 한번도 질린 적 없고 여전히 새로 배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그의 말이 다시금 생각났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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