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일본 수출규제 4년이 남긴 것

정영효 도쿄 특파원
“100% 일본제를 쓰던 삼성과 LG가 물량의 20%를 한국 중소기업에 배정하고 있다.”

한 경영 컨설턴트가 전한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이후 한국 생산현장의 변화다. 규제 대상이었던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 3개 소재의 얘기가 아니다. 황산, 인산과 같은 기초 화합물부터 솔벤트 같은 세정제까지 소재 전반에 걸쳐 대기업의 ‘국산 할당’이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성능도 우수하고 가격도 합리적인 일제를 당연시하던 한국 대기업이 20% 정도는 의도적으로 한국 제품을 쓴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소재는 가격이 좀 비싸져도 괜찮으니 개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수출 규제에 데인 한국 대기업들이 제2, 제3의 공급망 단절에 대비해 대체수단을 마련해 두려는 전략이다.

日 소재 기업 대부분 '유탄 맞았다'

지난 3월 일본 정부가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를 철회한 데 이어 지난달 28일 한국을 수출심사 우대국 명단(화이트리스트)에 복귀시키면서 4년간의 한·일 수출 분쟁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지난 4년 동안 불화수소와 같이 규제 대상에 오른 소재를 생산하는 일본 기업의 타격이 컸다는 사실은 일본 미디어의 보도로 여러 번 알려졌다. 한국 대기업 고객과 거래하던 대부분의 일본 소재 기업이 유탄을 맞고 있다고 이 컨설턴트는 증언한다. 한국을 때린 후유증이 생각보다 깊고, 오래간다는 것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미·중 패권경쟁이 격렬해진 시기와 겹친다. 한국과 일본은 세계에서 중국 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다. 리처드 볼드윈 주네브국제고등문제연구소 교수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한국과 일본 제조업은 생산량의 16%와 6%를 중국산 부품에 의존했다. 2009년 이후 6년 만에 의존도가 4~6%포인트 늘었다.

지난해부터 자유 진영 국가는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하려 움직이고 있다. 이런 때에 일본이 반도체 분야의 한국 공급망을 자르려 한 건 ‘자해’라는 평가다.

'자해성 분쟁' 두 번은 안 돼

중국으로부터 수입이 2개월만 끊겨도 일본 경제가 53조엔(약 521조원)의 손실을 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중국을 공급망에서 떼어내는 순간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10%가 날아가는 셈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일본의 주력 제품 80개를 생산하는데 중국산을 완전히 배제하고 공급망을 일본이나 다른 지역으로 옮기려면 연간 13조7000억엔의 비용이 들어간다. 도쿄증시 상장 제조업체 전체 순이익의 70%에 달하는 액수다. 제조업체들이 늘어난 비용을 가격에 전가하면 일본의 PC 가격은 18만엔으로 50%, 스마트폰 가격도 9만엔으로 20% 치솟는다.

금융시장은 이미 ‘중국 리스크’를 예민하게 반영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세계 1만3000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중국 매출 비중이 50~75%인 곳의 작년 말 주가는 2009년에 비해 10% 떨어졌다. 반면 중국 비중이 25% 미만인 기업 주가는 60% 올랐다.

국제 정세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이런 때 공급망이 서로 촘촘하게 얽혀 있는 한국과 일본이 또다시 자해성 분쟁을 벌인다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금융시장은 주가로 경고하고 있다. 수출 규제를 시작한 일본이 특히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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