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韓배터리 '초격차 유지'만이 살길

서정환 산업부장
1996년 4월 LG화학(현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연구소에 특명이 떨어졌다. 1999년까지 리튬이온전지를 양산하라는 지시였다. 조사, 실험, 시험공장·양산공장 건설, 안정화 등에 족히 5년은 걸리는 프로젝트였다. 순서를 밟아갈 여유가 없었다. 개발 착수와 동시에 100억원을 들여 시험공장을 착공했다. 준공 시점에 제품 개발도 끝내야 했다.

원재료는 배터리를 뜯어내 음극, 양극, 분리막, 전해액을 분석했다. 일본업체를 끈질기게 설득해 소니, 마쓰시타 등에 납품되는 장비들도 알아냈다. 장비 테스트를 위해 국내에서 3000개의 전극을 만들어 일본으로 공수했다. 연구원들이 3주간 3교대로 투입됐다. 이때를 ‘3천 교육대’ 시절이라고 부른다. 1997년 11월 시험공장에서 시제품 생산에 성공했다. 세계 최고 용량(1800mAh), 최경량(150Wh/㎏) 배터리였다. 1999년 1월엔 국내 최초로 양산에 들어갔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10년대 들어 전기차용 배터리를 기반으로 급성장했다. 삼성SDI, SK온도 이 분야에 진출했다. 한국은 지난해 중국을 제외한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다.

너무나 다른 美 IRA와 반도체법

지난달 31일 나온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관련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세부 지침 규정안’은 K배터리의 존재감을 재확인시켰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한국에서 광물·부품을 가공해 미국에서 배터리를 생산하면 보조금을 준다는 의미다. 업계와 정부 의견이 상당 부분 반영된 건 우리 배터리 회사들이 좋아서는 아닐 게다. 한국 배터리가 없으면 미국 완성차업체가 전기차를 만들 수 없어서다. 국내 배터리 3사의 수주 잔액은 올해 1000조원 돌파가 확실시된다.

미국 정부가 앞서 발표한 반도체지원법은 크게 달랐다. 정부 보조금을 받은 반도체회사는 초과이익을 공유해야 하고 중국 사업에 제약도 감수해야 한다. 최근에는 회사 기밀자료까지 제출하도록 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는 지원법인지 희망고문법인지 헷갈릴 정도다.

'한국판 IRA법' 검토할 때

K배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그룹 중심의 사업 진출이다. 삼성, SK, LG그룹의 투자 역량이 성장의 기반을 제공했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자체 수요처도 확보했다. 그룹 간에는 치열히 경쟁했다. SK와 LG는 수조원대 영업기밀 침해 소송전까지 불사했다. 그러면서도 각자 자체 배터리 기술을 확보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10년 동안 5조3000억원을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현재 2만6000여 건의 관련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에 3사 모두 뛰어들었다.

배터리는 제2의 반도체이자 ‘미래 산업의 쌀’로 불린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연평균 30%씩 성장해 2030년 500조원에 이를 전망이다(SNE리서치). 정부는 지난달 배터리를 포함한 6대 핵심산업 육성 전략을 발표했다. 하지만 반도체에 비해 배터리 인력 양성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광물 등 공급망 관리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판 IRA법도 필요하다. 정부도 이제는 입(규제)은 닫고 지갑(지원)은 열 때다. 초격차 유지만이 한국 배터리 업계가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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