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크리스마스 휴전

“어머니, 저는 지금 참호에서 파이프담배를 피우고 있어요. 이건 독일 담배예요. 그러면 어머니는 ‘죄수나 포로의 담배겠지’라고 하실 테죠. 아닙니다. 독일 병사가 자신의 참호에서 직접 갖다준 겁니다. 어제 영국과 독일 병사들이 양측 참호 사이의 무인지대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선물을 교환했죠. 성탄절 내내 말입니다. 정말 경이롭지 않습니까.”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년 말 서부전선 런던 소총여단의 19세 이등병 헨리 윌리엄슨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다. 당시 성탄절을 앞두고 프랑스 동북부와 벨기에 등 서부전선 여러 곳에서 비공식 정전(停戰·전투 중지)이 이뤄졌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양측은 전선을 따라 깊은 참호를 파고 대치했는데, 성탄절이 다가오자 무인지대에서 만나 대화하고 음식, 담배, 신문 등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캐럴을 함께 불렀고 축구까지 했다.성탄절 자정까지는 서로 총을 쏘지 않기로 한 양측 군인들은 거짓말처럼 친구가 됐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어떻게 다시 서로 싸울지 걱정할 정도였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최소한 천사들이 노래하는 동안만이라도 총성이 들리지 않게 하자”며 교전 당사국에 공식 정전을 요청했다. 하지만 양측 지휘부는 정전을 강력히 금지했고, 이듬해 대폭 줄어들었던 크리스마스 정전은 1916년 완전히 사라졌다. 참혹한 전쟁 중에도 인간애를 보여준 ‘크리스마스 정전’이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소설, 영화, 책으로도 만들어졌다. 2005년 개봉한 ‘메리 크리스마스’도 이를 소재로 한 영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크리스마스 휴전’ 가능성이 사라지는 모양새다. 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12일 평화협상의 첫 단계로 크리스마스까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곧 우리는 수십억 명의 사람이 축하하는 휴일을 맞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침략이 아니라 평화를 생각하는 시기”라고 말해 크리스마스 휴전 기대를 키웠다. 그러나 러시아는 “크리스마스 또는 새해 휴전은 우리 의제에 없다”고 거부했고, 우크라이나군도 휴전 가능성을 일축했다. 러시아의 발전소 등 에너지 시설 집중 공격으로 혹한, 암흑과도 싸워야 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겨울나기가 걱정된다.

서화동 논설위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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