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료한 것이 늘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고는 늘 명료하다

한경 CMO Insight

광고에서 채굴한 경영 스티커 메시지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한국광고학회 제24대 회장)
김병희 서원대 교수
유대인의 지혜서로 알려진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많은 단어로 적게 말하지 말고 적은 단어로 많은 것을 말하라.”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누구보다 많은 경영자나 정치인들이 깊이 새겨야 할 경구다. 어떻게 해야 적은 단어로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까?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인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 1847-1911)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짧게 써라. 그러면 읽힐 것이다. 명료하게 써라. 그러면 이해할 것이다. 그림 같이 써라. 그러면 기억 속에 머무를 것이다. 무엇보다 정확히 써라. 독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전에서 단골로 소개되는 문구이기도 하다.

이런 말도 있다. “Less is more.” 미니멀리즘을 표방하는 현대의 건축 철학이다. 이 짧은 문장을 정확히 번역하기란 정말 어렵다.

“적을수록 좋다”, “빼기가 곧 더하기다”, “덜한 것이 더 낫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광고에서도 더하기(+)가 아닌 ‘빼기(-)의 미학’을 강조한다. 어쨌든 빼고 버리고 내려놓는 게 더 낫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네덜란드의 핏 앤 슬랑크 광고 ‘식재료’ 편(2020)에서는 “Less is more”라는 헤드라인을 써서, 덜 먹고 더 많은 것을 얻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핏 앤 슬랑크(Fit & Slank)는 다이어트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네덜란드에서 널리 알려진 회사다.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고 사람들에게 3가지 규칙과 7가지 약속을 지키라고 주문하며 피트니스 훈련을 실시한다.

자격을 갖춘 영양 코치가 핏과 슬림(Fit & Slim)에 대해 조언하고 동기를 부여한다.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몸무게까지 감량함으로써 자부심을 갖게 된다.광고를 보면 식탁에 채식 위주의 식재료가 놓여있는데, 적을수록 좋다는 조리법을 제공한다는 메시지를 이처럼 표현했다.

건강한 식단으로 목표 체중을 달성할 수 있다거나 훈련 프로그램의 내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모두 제거해버렸다. 광고 창작자들은 네덜란드인들이 많이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 싶다.

식재료 몇 개와 헤드라인만 남겼다. 광고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는 다 제거함으로써,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핏 앤 슬랑크 광고 ‘식재료’ 편 (2020)
스위스의 하이포스위스(Hyposwiss) 프라이빗 뱅크의 광고 ‘여백’ 편(2017)을 보면 넓은 지면에 헤드라인만 있을 뿐이다. 그밖에는 모두 여백이다.

프라이빗 뱅크(private bank)란 고소득자나 자산가들에게 은행에서 별도로 제공하는 투자 정보나 금융 서비스이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고객 맞춤형의 은행 서비스이다.

법인화되지 않은 은행 기관인 개인 은행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광고의 헤드라인은 “Less is not more”인데, 어떠한 설명도 없다.

기존에 널리 알려진 “Less is more”를 비틀어, 이 말을 부정하는 메시지를 만들어냈다. “적을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뜻. 익숙한 말을 은행 광고의 특성에 맞게 표현했다.

수익이나 이자를 덜 주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다는 의미를 절묘하게 풀어냈다. 더 이상 뺄 수 없을 때까지 군더더기를 제거하자 핵심 메시지만 남았다. 적은 단어로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지면의 오른쪽 하단에는 “기대하던 것을 기대하라(Expect the expected)”라는 멋진 슬로건도 붙였다.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다 제거하고 여백의 미를 살린 레이아웃에 매료돼 사람들이 호기심을 더 느낄 수 있다.
하이포스위스 프라이빗 뱅크 광고 ‘여백’ 편 (2017)
두 광고에서 채굴한 경영의 스티커 메시지는 명료성(Clarity)이다. 명료성이란 뚜렷하고 분명한 성질이다. 글이나 말에서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선명한 뜻을 말한다.

명료성은 주로 설명문과 논설문은 물론 연설문에서도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작용한다. “Less is more” 또는 “Less is not more” 같은 헤드라인은 뚜렷하고 분명하다.

현대 건축에서 지향하는 미니멀리즘 철학이 “Less is more”에 담겨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경구는 현대 건축의 3대 거장으로 추앙받는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가 1947년에 미니멀리즘 건축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썼다는 식으로 인용되고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이 1855년에 발표한 시 <안드레아 델 사르또(Andrea del Sarto)>에 이 시구가 있다.

필자가 확인해본 결과, 이 시의 78행에 “Well, less is more, Lucrezia….”라는 대목이 나온다.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이 말을 창조하지는 않았고 브라우닝의 시를 읽다가 차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면 시를 읽지 않았지만 우연의 일치로 불현듯 떠올랐을 수도 있다.

시대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 중국 명나라 때의 문인화가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소중현대(小中現大)’를 강조했다. 동기창 화론(畫論)의 핵심은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드러내는데 있었다.

동양의 ‘소중현대’가 서양의 “적을수록 좋다(Less is more)”보다 훨씬 먼저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명료성이 시대의 언어를 창조하는 원천이다.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광고 슬로건에 선정된 “우유 있어요?(Got milk?)”는 오직 두 단어에 불과하다.

빌 클린턴도 1992년의 미국 대선에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명료한 한 마디로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경영자나 정치인은 물론 보통 사람들도, 적은 단어로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언어적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너무 복잡하고 장황한 말은 경계하자.

어찌 말 뿐이겠는가.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명료한 것이 늘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고는 늘 명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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