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 백신 수주해놓고 본계약 아직 못한 까닭

작년 10월 국제기구 CEPI와
年 5억회분 CMO 계약했지만
아직까지 수주 진전 없어

美·英 백신 자국우선주의로
충분한 재고 쌓여야 기회 올 듯
전 세계적 원료 부족도 걸림돌
녹십자는 작년 10월 국제기구인 전염병대응혁신연합(CEPI)과 연 5억 회분(도즈)의 코로나19 백신 위탁생산(CMO) 계약을 체결했다. 업계에선 1회분당 1~3달러 수준(5500억~1조6500억원)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전망했다. 녹십자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503억원. 백신 CMO 사업으로 최소 10배의 영업이익을 올릴 수 있는 ‘깜짝 계약’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실제 매출로 이어지는 본계약 체결은 이후 9개월 동안 깜깜무소식이다. 작년 10월 완공된 충북 오창의 CMO 공장 역시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백신 CMO 중 가장 큰 계약을 맺으며 업계 ‘신데렐라’로 떠올랐던 녹십자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CEPI 확보 물량 부족

CEPI와 녹십자가 계약을 체결한 건 작년 10월 21일이다. CEPI는 감염병 대응을 위해 2017년 출범한 국제 민간기구다. 백신 개발 회사나 연구기관에 개발 비용을 대주고, 나중에 백신을 받아 개발도상국 등에 지원해주는 역할을 한다.

녹십자는 생산된 의약품을 바이알(주사용 유리 용기)이나 주사기에 충전하는 완제 공정을 맡는다. 수년 동안 준비했던 충북 오창 완제 공장이 때마침 완공된 덕분에 계약할 수 있었다. 한 바이오 애널리스트는 당시 “세계적으로 의약품 생산 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바이오의약품 CMO 강국인 한국 기업을 선점한 것”이라고 호평했다.

CEPI와의 계약대로라면 지난 3월엔 본격 생산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현재까진 ‘설(說)’만 있을 뿐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다. 계약 체결이 늦어지는 이유는 복합적이다.가장 큰 이유는 백신 자국우선주의다. CEPI 지원을 받아 백신 상용화에 성공한 미국 모더나와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등은 자국 정부의 지원도 동시에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의 물량을 자국 정부에 우선 공급하고 있다. 이 중 일부를 우방국가 또는 선(先)계약을 맺은 국가에 보내고 있다. 녹십자는 CEPI가 확보한 물량을 받아 위탁생산하기로 했는데, CEPI가 확보한 물량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 된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영국 등이 충분한 재고를 쌓은 뒤에야 다른 국가들이 백신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며 “특히 백신을 세 번 맞는 ‘부스터샷’ 도입 여부가 결정돼야 본계약 체결에 속도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백신 CMO도 지지부진

원료 부족과 낮은 수율 등으로 백신의 내용물인 원액이 부족한 것도 영향을 주고 있다. 백신 개발 회사들은 대부분 임상 1~3상을 함께 진행했던 위탁개발생산(CDMO) 회사에 대부분의 생산을 맡기고 있다. 개발 과정에 참여했고, 생산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모더나의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을 생산하고 있는 스위스 론자가 대표적이다.

한 바이오 애널리스트는 “미국 등에는 완제 공정을 할 수 있는 회사가 많기 때문에 원액이 충분히 남아야 그 물량이 녹십자로 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이유로 작년 10월 녹십자와 함께 CEPI로부터 완제 CMO 계약을 맺은 스페인의 바이오파브리도 아직 본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그렇다고 선뜻 러시아의 코로나19 백신 CMO를 맡을 순 없다. 녹십자는 러시아의 스푸트니크V와 코비박 백신의 CMO를 검토했지만 아직 결정을 못하고 고심하고 있다. 한 백신 CMO 회사 대표는 “러시아 백신은 효능이나 부작용을 이유로 생산이 갑자기 중단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섣불리 계약했다가 더 큰 이익(계약)을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미국 노바백스 코로나19 백신의 승인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CEPI 지원을 받은 회사인 데다 상온 보관이 가능해 아프리카 등 백신 인프라가 부족한 곳에서도 쓰일 수 있다. SK바이오사이언스가 노바백스의 기술을 들여와 한국에서 생산할 예정이다. 원액은 SK바이오사이언스, 완제 공정은 녹십자가 맡을 수 있다는 얘기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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