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 진단부터 공사까지 4개월내 끝내라?" 中企 반발

주52시간제에 중대재해法까지…"CEO 범법자 취급말라" 호소
고용부 시행령엔 계도기간 명확성 등 中企 요청 반영안돼
"인력 예산 아무리 완벽해도 사고나면 처벌 피하기 어려워"
수도권 한 뿌리기업에서 직원이 공정을 지켜보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9일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공개한 가운데, 중소기업계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이날 입장문 발표를 통해 “중소기업계는 법 제정 과정에서부터 일관되게 경영책임자의 범위와 의무 등을 명확히 할 것과 의무 이행시 면책근거 마련, 안전보건 인프라 확충을 위한 정부지원 확대 등을 요청해 왔다”며 “그럼에도 정부의 시행령안은 중소기업계 요청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고, 이대로 시행될 경우 중소기업 현장에 상당한 혼란과 충격이 초래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중대재해처벌법상의 의무주체(처벌대상)가 여전히 모호해 경영책임자에 대한 명확한 정의 규정이 없다”며 “의무사항 역시 ‘적정’, ‘충실’ 등의 추상적 표현을 담고 있어 법령을 준수하고 싶어도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없는 노릇”이라고 비판했다.

시행 4개월 전에야 확정… 中企 "중대재해법 준비할 시간과 여력이 없다"


중소기업계는 준비할 시간과 비용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양옥석 중소기업중앙회 인력정책실장은 "당초 시행령 초안 부칙엔 시설 투자 등 준비기간을 고려해 시행 후 2개월까지는 처벌의 유예기간을 두는 내용이 있었는데, 막판에 빠졌다"며 "입법예고기간(40일) 등 입법 절차를 고려하면 오는 10월쯤 최종안이 나올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시행일(내년 1월27일)까지 4개월여만에 각종 시설과 인력 배치를 완료하나"라고 지적했다. 오는 10월 확정안이 나오면 중대재해처벌법 컨설팅 사업만 호황을 보여 중소기업의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중대재해처법 등 산업안전 규제는 전문적인 분야여서 자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중소기업이 거의 없다"며 "대부분 전문 컨설팅업체에 수백만원짜리 진단을 받아야하고, 이후 조명과 컨베이어벨트 덮개 등 시설 교체 및 설치 작업으로 수억원을 써야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종사자 50인 이상 기업수는 3만525개다. 이들 대부분이 중소기업으로 코로나사태로 대출로 연명하는 곳이 많아 중대재해처벌법 대응 여력이 없다는 지적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중소기업 대출 증가액은 87조9000억원으로 예년의 2배수준이다. 중소기업의 절반이상인 52.8%는 영업이익으로 금융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기중앙회는 정부에 여러차례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한 비용 지원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력과 예산 아무리 완벽해도 사고나면 처벌 피하기 어려워"


아무리 인력과 예산을 완벽하게 갖추더라도 사고시 대표가 처벌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도 중소기업들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다. 이상철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애매한 시행령 규정 때문에 노동청 검찰 등 수사기관과 법원의 재량만 커졌다"며 "기업이 아무리 인력과 예산을 완벽하게 갖췄더라도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처벌을 피할 수 없는 구조가 됐다"고 지적했다. 실제 시행령엔 '적정한 예산을 편성하고', '인력이 적정 규모로 배치돼', '필요한 조치를 할 것'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가 많다. 사고 후 "적절한 예산이 편성되지 않았다"고만 하면 얼마든지 처벌이 가능해진 셈이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인력과 예산을 어느정도 준비해야하는 지 혼란스러워하는 중소기업 대표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또 '안전·보건 관계 법령에 따른 의무이행'이라고 문구 역시 경제단체들이 모두 '가시'로 꼽는 애매한 표현이다. 기존 산업안전보건법 테두리를 넘어 화학물질관리법,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 고압가스안전관리법, 고압가스법, 시설물 안전 및 유지에 관한 특별법, 승강기안전관리법 등 그 범위가 무한대로 넓어지기 때문이다. 이밖에 중대재해로 지정된 질병의 중증정도에 대해 별도의 규정이 없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화학물질을 많이 다루는 국내 뿌리기업들이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 시행령상 책임의 주체도 애매해 중소기업계에 타격을 줄 전망이다. 대기업과 달리 안전담당 임원을 따로 둘 여력이 없고 대부분 오너가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경우 한번 사고가 나면 곧바로 공장문을 닫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김기문 중기중앙회 회장은 "통계에 따르면 작업장 사고에서 근로자 과실 비율이 70%를 넘는다"며 "사고 발생시 오너가 처벌을 받으면 사고 수습도 안돼고 기업도 풍비박산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상철 태평양 변호사는 "현 시행령상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대표이사는 무조건 조사를 받게 되는 구조가 됐다"며 "인력과 예산, 시설이 부족한 중소기업에 타격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임우택 한국경영자총협회 본부장은 “이번 시행령은 애매한 표현들이 너무 많아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며 “위헌 요소도 있다”고 말했다. 한 중소기업단체 대표는 "원자재가격 급등, 주52시간 근무제 확대, 유급휴일 확대 등에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국내 664만개 중소기업들은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이라며 "중대재해처벌법까지 시행되면서 이제는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겠다는 중소기업인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중기중앙회는 이날 “중대재해 예방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의무주체, 의무사항, 의무이행시 면책 등을 명확하고 예측 가능하도록 시행령에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형편이 어려운 중소기업들의 안전보건 인프라 확충을 위한 정부의 재정지원도 긴요하다”며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다른 경제단체들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보완 의견을 정부에 적극 개진할 것”이라고 했다.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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