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엔 사업보국, 사후엔 통큰 나눔…'진짜 기업가 정신' 남기다

故 이건희 회장 유산 26조 중 15.5조 사회로 돌려줘

대한민국 초일류 시대 열어
반도체·스마트폰 신화 일구며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 만들어
국가 위상 높이는 기반 마련
< 서울시에 기부한 어린이집 > ‘냉정한 승부사’로 불렸던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은 사회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인색하지 않았다. “사회 환원과 문화사업을 하는 것은 기업 본연의 자세”라고 말할 정도로 사회공헌에 대한 그의 철학은 확고했다. 사진은 1990년 7월 신길동 ‘꿈나무어린이집’ 현판식에 참석한 이 회장과 고건 서울시장. 삼성복지재단이 건립해 서울시에 기부했다. /삼성전자 제공
고(故) 이건희 회장이 이른바 ‘출근경영’에 나섰던 첫날인 2011년 4월 21일. 이 회장은 업무보고가 끝나자마자 서울 서초동 사옥 1층 ‘서초 삼성어린이집’부터 찾았다. 그는 직원들에게 대기 중인 어린이가 몇 명인지, 부모들의 만족도가 높은지 등을 꼼꼼히 물었다. “대기자가 많다”는 답을 들은 이 회장은 그 자리에서 어린이집을 더 늘릴 것을 주문했다.

“성장의 과실 사회와 나눠야”

‘자나깨나 사업만 생각했을 것’이란 세간의 예상을 깨는 일화다. 이 회장은 1980년대 후반 재계에서 ‘어린이집 회장’으로 불렸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한 직후 재계 차원에서 어린이집을 짓자고 제안했다. 다른 기업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이 회장은 삼성만이라도 보육시설을 짓자며 삼성어린이집을 세웠다. 가난한 인재에게 해외 유학의 기회를 주는 삼성장학회도 이 회장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삼성장학회는 2002년 1기를 선발한 뒤 2015년 14기까지 총 14회에 걸쳐 1400명에 달하는 유학생을 지원했다.

이 회장은 흔히 ‘냉정한 승부사’에 비유된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기업으로 키운 먹거리를 발굴했다는 이유에서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 불량품을 불태운 ‘휴대폰 화형식’ 등의 일화가 그의 날카로운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 하지만 이 회장을 잘 아는 삼성 관계자들은 다른 얘기를 한다. “성장의 과실을 사회와 나눠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설명이다.

그의 어록 중에도 유독 사회공헌과 관련된 것이 많다. 이 회장은 1994년 신년 하례식에서 “이익을 내고, 배당을 해주고, 남는 자금으로는 사회 환원과 문화사업을 해야 하는 것이 기업 본연의 자세”라고 강조했다. 2001년 신년사에선 “삼성은 사회와 함께하는 기업시민으로서 더불어 사는 상생의 기업상을 구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소외된 이웃에 눈을 돌리고 따뜻한 정과 믿음이 흐르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은 선도기업인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유족들이 26조1000억원의 유산 중 상속세를 포함해 15조5000억원을 환원하기로 한 것도 이 회장의 영향 때문이라는 게 삼성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시각이다. 삼성 관계자는 “유족 모두가 사회에 많은 것을 돌려줘야 한다는 이 회장의 유지를 계승하자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며 “장기적인 사회공헌 사업에 힘쓰겠다고 발표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삼성전자 등 관계사들도 사업과 사회공헌으로 국가에 기여하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실천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제계에서는 이 회장과 유족들이 기업가 정신의 ‘정석’을 보여줬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이 회장은 대한민국이 글로벌 강국으로 도약할 토대를 만든 기업인”이라며 “생전 이룩한 것들을 사회에 환원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면서 경제계 전체의 귀감이 됐다”고 말했다.

상속세만 12조원 이상 역대 최대

유족들이 납부할 상속세 규모에도 이목이 쏠린다. 의료 분야 기부와 미술품 기증으로 과표가 줄어들었음에도 12조5000억원 안팎을 내게 된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역대 최고 수준의 상속세이자 지난해 정부가 거둬들인 총 상속세 세입액의 서너 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는 2018년 11월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고 구본무 회장의 유족들이 기록한 종전 최고 상속세액 9215억원의 10배가 넘는 규모다. 해외와 비교해도 2011년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사망 당시 유족들이 부담한 3조4000억원의 3.4배에 달한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유산에 대한 상속세 고지액 176억원의 680배 수준이다. 이 회장은 1988년 한 인터뷰에서 “상속세는 정직하게 계산해야 한다. 선친께서도 사람의 최종 마무리는 상속세로 나타난다고 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삼성 측은 이 회장이 보유했던 삼성 계열사 주식과 경기 용인 일대의 부동산, 기증 목록에서 빠진 일부 미술품 등의 가치를 감정해 과표를 산정했다고 설명했다. 국내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지만 최대주주가 지분을 승계하는 경우에는 주식 가치에 20% 할증률이 적용돼 세율이 60%가 된다.

송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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