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길의 경제산책] 경제 '위축' 아니라 '엄중하다'는 정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가운데)이 지난 1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26차 경제활력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경DB
한 정부기관이 어제 아침 일찍 배포했던 보도자료를 오후에 수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자료의 일부 문구를 고치는 내용이었지요. 기자들에게 전달했던 보도자료를 수정하는 건 종종 발생하지만, 숫자나 이름을 틀린 게 아니라 문구만 조금 바꾸는 건 드문 일입니다.

이 정부기관이 수정 직전 썼던 표현은 ‘미중 무역협상 등의 영향으로 전반적 경제심리가 위축되고 있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였습니다. 이걸 ‘미중 무역협상 등 대외적 불확실성으로 경제 상황이 엄중한 가운데에서도’로 바꿨지요.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처음에 썼던 ‘미중 무역협상 등의 영향으로’란 문구는 대외 통상 환경의 영향 뿐만 아니라 국내 정책적 오류를 포괄할 수 있는 중의적 표현입니다. 이것을 ‘미중 무역협상 등 대외적 불확실성으로’로 바꾸면 국내 경기 부진은 오롯이 대외 환경 탓이 되지요. ‘등’ 단어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달리 표현되는 겁니다.

또 하나는 ‘경제심리 위축’이란 용어를 빼고 ‘경제 상황 엄중’을 넣은 겁니다. 국내 경제심리가 전반적으로 위축되는 어려운 여건이란 문구 대신 경제 상황이 엄중하다는 다소 모호한 표현으로 대체됐습니다. ‘엄중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예사로 여길 수 없다’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사소하지만 예민한 문구의 수정은 요즘 정부의 처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청와대와 정부는 최근까지도 “경제와 고용 상황이 좋다”고 강조해왔지요.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란 비판이 많았습니다.그런 탓인지 당정청은 ‘경제가 엄중하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위축됐다’거나 ‘경기가 좋지 않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잘 쓰지 않지요. ‘얼마 전까지 경제가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피하는 한편 내년도 확장적 재정 정책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대표는 지난 12일 국회에서 열린 당정청 및 지방정부합동회의에 참석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올해 반영된 예산을 차질없이 진행하는 것”이라며 “경제 상황이 엄중해 비상한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앞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10일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경제를 둘러싼 대내외 환경이 엄중하다”고 했고,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1일 기자들과 만나 “경제 상황이 엄중하다는 인식 하에 할 수 있는 모든 정책역량을 투입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역시 “일본 수출규제 등 글로벌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우리 경제도 엄중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평가했지요. 마치 말을 맞춘 듯 비슷한 표현들입니다.

경제가 엄중하지만 어렵지는 않다는 뜻일까요.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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