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맞서 7兆그룹 일군 '캡틴 KIM'…"동원 미래 50년은 AI로 승부"

김재철 회장의 아름다운 은퇴

'참치왕'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단독 인터뷰
그냥 창립 50주년 인터뷰라고 생각했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85)을 서울 양재동 동원산업 집무실에서 만난 것은 지난 15일이었다. 밝게 웃으며 기자 일행을 맞은 김 회장의 복장이 예사롭지 않았다. 밝은 회색 양복에 분홍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새신랑 같습니다”고 하자 그는 멋쩍게 웃었다. 이런 옷을 입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인터뷰를 시작한 지 20분쯤 지나서였다. “50주년 기념식에서 어떤 말씀을 하실 겁니까”라고 묻자 담담하게 답했다. “지나고 보니 검푸른 빛의 사나운 파도를 배 타고 넘던 순간이 그립기도 합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은퇴 선언이었다. 참치잡이 어선에 처음 올라탔던 23세 때처럼 봄꽃 같은 화사한 셔츠와 넥타이를 맨 것은 새로운 출발을 뜻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인공지능(AI)을 다룬 일본어 책이 여러 권 놓여 있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
원시산업으로 6차산업

김 회장은 대한민국 산업사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동원산업은 1970년대 외화벌이의 주역이었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새로운 단백질인 참치의 공급원이었고, 해양 개척의 중요성을 알렸다. 다른 기업이 내수 시장에서 시작한 데 비해 동원산업은 세계무대에서 출발했다. 그는 기업경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업이 적자를 내는 것은 죄악이다. 기업도 시민인데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실제 동원은 나랏돈을 빌려 일을 벌이거나 적자로 주주들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다.김 회장은 1958년 남태평양 사모아로 향하는 참치잡이 어선 지남호에 승선했다. 7년간 배를 타고 지구 200바퀴를 돌았다. 1960년대 이전까지 한국 선박들은 제주도를 못 벗어나고 있었다. 김 회장은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은 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나라”라고 생각했다. 고려원양에서 일하던 시절 얻은 평판과 신용으로 일본 자본가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어획을 통해 벌어서 갚는다는 조건으로 지급보증 없이 37만달러의 현물 차관으로 원양어선을 처음 도입했다”고 했다. 자본금 1000만원, 직원 3명으로 서울 명동의 작은 사무실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지금도 창업할 때 정한 사시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동원의 사시는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의 실현’이다. 1969년이면 사시를 정한 회사도 많지 않았을 시절이다. 이때 이미 기업이 사회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닫고 있었다고 했다. 그의 눈은 오래전부터 미래와 세계를 향했다. 수산업으로 자리를 잡은 뒤 종합식품회사와 금융업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큰 배를 타든, 작은 배를 타든 선장은 하나라는 원칙으로 신중한 경영을 하되 과감하게 투자할 때를 놓치지 않는 결단력이 필요했다”고 했다.해양 개척으로 외화벌이 ‘주역’

동원산업은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참치를 잡아 팔고 대부분 달러로 그 값을 받았다. 바다에서 잡은 모든 참치는 거의 전량 해외 시장으로 수출했다. 김 회장은 “우리는 자원이 없는 나라지만 바다 개척을 통해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처음 배를 탔을 때는 일본이 쓰다 버린 배를 타고 가야 했고, 외국에 나가서도 홀대받는 억울한 일을 많이 겪었다”고 했다. 새로운 어법을 개발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원양어업에 적용해 동원산업은 성장을 거듭했다.

선장을 하며 익힌 순간 판단력은 그를 승부사로 만들었다. 거대한 위기는 동원그룹이 성장하는 기회로 변하곤 했다. 1973년 중동전쟁으로 인한 1차 오일쇼크 때 동원은 창사 4주년이 된 작은 수산업체였다. 천정부지로 유가가 올라 외국 회사들이 사업을 축소할 때 김 회장은 국내 최대 규모인 4500t급 ‘동산호’를 건조했다. 선가만 1254만달러로 당시 참치연승선 10척을 건조할 수 있는 돈이었다. 동원산업 전체 자산보다 많은 액수였다.위기 때마다 대규모 투자로 승부

남들이 파도를 피할 때 김 회장은 파도를 가르고 나가는 재주가 있다. 김 회장은 “지난 50년을 되돌아봤을 때 증권업에 진출한 일, 스타키스트를 인수한 것, 그리고 그 결과 세계 최대 수산기업을 이룬 것이 3대 명장면”이라고 했다.

참치캔 출시와 증권업 도전은 1982년에 한 일이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 최고경영자과정(AMP)을 이수하며 증권업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눈을 떴다”고 증권업 진출 배경을 설명했다. 1982년 시중은행 민영화로 한신증권이 매물로 나왔을 때 트롤선 구매를 위해 모아뒀던 유보금을 베팅했다. 동원산업 자본금 20억원으로 70억원 규모의 회사를 산 것. 동원증권은 지금 한국투자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김 회장은 지난 50년을 돌아볼 때 미국 1위 참치캔 회사 스타키스트를 인수한 장면을 잊을 수 없다. 1960년대 그가 ‘뱃사람’으로 살던 때 스타키스트는 참치를 잡아 납품하던 회사였다. “배에 탄 선원들은 가족들에게 유서도 남기고 오고, 고국의 흙 냄새를 맡겠다고 주머니에 흙을 싸들고 오던 시절이었다”며 “당시 스타키스트는 엄청난 회사였다”고 했다. 그런 세계 최대 참치캔 회사가 매물로 나온 것은 2008년이었다. 김 회장은 “3억6300만달러라는 거액이라 반대하는 직원들이 많았지만 개척자 정신을 강조하고 ‘내가 책임질 테니 해보자’고 설득했다”고 했다. 스타키스트는 동원그룹 인수 후 반년 만에 흑자 전환했고, 현재 동원그룹에서 가장 이익을 많이 내는 핵심 계열사가 됐다.

“동원의 다음 50년…AI 연구”김 회장은 “창업한 해인 1969년은 인류 최초로 우주인 닐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디딘 해인데, 우리는 바다 한가운데서 낚시를 드리워 놓고 참치가 물기를 기다리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만큼 뒤처져 있었다는 얘기다. 이어 “엄청난 차이를 동원 가족 2만 명의 노력으로 많이 좁혔다”고 했다. 앞으로의 과제를 묻자 그는 “남아있는 경영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AI를 이해하지 못하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 출간된 AI와 관련한 책들을 번역해 주요 임원들과 토론도 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변화였다. 그는 “변화의 시대에 먼저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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