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생활 속 경제이야기] 경제학은 인정머리 없는 학문?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
가끔 경제학만큼 인정머리 없는 학문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경제학은 사회 현안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내려주는 방법론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 할 때가 많은 듯하다. 예를 들어 인간의 생명 문제도 경제학 영역에 해당한다. 인간의 생명을 누가 감히 경제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경제학은 생명에 대해서도 경제적 판단을 내려줘야 한다.

자전거 타기가 취미인 사람이 안전을 위해 헬멧을 구매하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선택할 수 있는 헬멧은 두 가지다. 하나는 10만원짜리고 다른 하나는 50만원짜리다. 10만원짜리는 머리 손상 확률을 0.1%포인트 낮춰주고, 50만원짜리는 0.2%포인트 낮춰준다고 가정하자. 이때 구매자가 자금 여력이 있음에도 10만원짜리를 구매했다면 그는 자신의 머리 가치가 2억5000만원 이하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구체적으로 알아 보자. 그가 머리 손상을 0.2%포인트 낮출 기회를 주는 50만원짜리 헬멧을 구매했다면 자신의 머리 손상을 0.2%포인트 낮추는 것이 50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시 말해 2%포인트 낮추는 것은 500만원 이상, 20%포인트 낮추는 것은 5000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신의 뇌 손상을 100% 없애는 데는 적어도 2억5000만원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그런데 헬멧 구매자는 자금 여력이 있지만 10만원짜리 헬멧을 선택했다. 이는 머리 손상 확률을 1%포인트 낮추기 위해 100만원까지 지급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결국 머리 손상 확률을 100% 낮추기 위해 1억원까지 지급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1억원의 가치가 없는 물건에 1억원을 들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헬멧 사례를 학문적 수사를 활용한 궤변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널리 활용되고 있다. 법원에서 배상액을 결정할 때도 이용된다. 특정 계약을 맺기 위해 다른 계약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포기한 다른 계약은 피해액 산정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법원은 피해자와 체결한 계약 때문에 포기한 계약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금전적 이익 수준으로 보상하도록 배상액을 산정한다. 배상액이란 잃어버린 기회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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