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꿀·쓱·뚝…1음절 된소리들이 풀어내는 상처와 향수

구효서 산문집 '소년은 …' 출간
‘스물네 개의 된소리 홑글자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소설가 구효서가 쓴 산문집 《소년은 지나간다》(현대문학)의 모든 이야기는 뻘, 꿀, 깽, 찍, 뺨, 쓱 등 된소리로 된 제목이 붙어있다.

소설가 구효서
이 홑글자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마을을 지켜보는 관찰자로 매번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이야기 속 모든 화자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된소리들이다. ‘뻘(갯벌)’에선 전후(戰後) 더 이상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마을을 묵묵히 바라본다. ‘뼈’는 썩는 것 중 가장 나중의 것이 자신이라고 소개하며 ‘진토(티끌과 흙)’를 말하고 사무침을 되뇐다.

왜 그런 된소리를 화자로 잡았는지에 대해 작가는 곳곳에서 설명하며 재미를 준다. ‘뚝’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그친 모양을, ‘쓱’은 슬쩍 사라지거나 지나가다 넌지시 행동하는 모양을 나타낸다고 말이다. 작가는 책 말미에 “표준어로 ‘진지잡수셨습니까’라는 말을 강화도 사투리로 ‘진지 잡쉈씨까’라고 표현하듯 당시 살던 동네는 된소리에 익숙하다”고 썼다.

이야기는 정지용의 시 《향수》처럼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한줄 한줄 더 읽다 보면 전쟁이 막 끝난 시절 민통선 인근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암울했던 그림자와 소년들 마음에 켜켜이 남아버린 상처가 세밀하게 드러난다. 욕과 비속어도 등장하지만 어지럽거나 내용을 해치지 않는다. 휴전된 지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절, 코앞에 휴전선을 맞닥뜨리고 있는 분단의 현실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모른 채 자연과 마을, 그 속에서 현재를 사는 아이들의 모습은 사뭇 측은하기도 하다. 그저 꽃과 빵, 떡, 꿀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이다. 스산했던 유년시절 이었지만 그 속 풍경과 향수, 희망을 소년의 시각에서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데 된소리 홑글자는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작가는 시공간을 1965~1970년으로 5년만 잡았다. 공간 역시 인천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로 한정했다. 홑소리 하나에 붙일 이야기의 범주가 무한정 넓어지는 걸 피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다. 일상의 빠듯함 속에서, 또 이 사람 저 사람과의 관계에 치여 잊고 살던 각자의 희미한 기억들을 유년시절 마을 속에서 하나씩 꺼내게 만든다.

“글을 쓰며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조금 더 알게 됐다”는 작가의 말처럼 읽는 이로 하여금 지나온 시간을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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