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용기를 주는 사람들

김성녀 <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중앙대 교수 sung-nyo@hanmail.net >
마당놀이 ‘이춘풍전’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로비에서 한 관객이 다가왔다. 자그마하고 귀가 잘생긴 청년이 홍조를 띠며 사인을 부탁하고는 학교에서 마당놀이 공연을 하려고 대본을 써봤다며 노트를 내밀었다. 새로 썼다기보다는 우리 공연 내용을 요약한 것이지만 열정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얼마 후 그 청년은 극단 미추에 입단했다. 30여 년 전에 만난 인연이다.

그 청년의 극단 생활은 참 많은 이야기를 남긴다. 두레패들의 생활양식을 따라 같이 먹고 잠자고 작업하는 환경에서 뛰어난 요리 솜씨로 배우들의 영양사가 됐고, 장인 수준의 바느질 솜씨로 필요한 의상을 척척 만들어 내며, 마당놀이 소도구와 분장에서 미용까지 모든 영역을 소화하고 중국어 통역까지 하는 극단 최고의 해결사였다.힘든 일을 내색하지 않고 늘 미소 띠며 행복에 겨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남사당패의 애환과 기예를 펼치기 위해 무대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배우로서의 열정도 잊을 수 없다. 그 와중에 중국으로 건너가 눈 깜짝할 사이에 표정이 수시로 바뀌는 ‘변검(變)’이란 기예를 익혔다. 변검술은 오랜 연습과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수하기가 쉽지 않은 분야다. 그 어려운 기술을 배워 와서 수없는 실패와 노력을 반복하며 우리의 전통탈로 바꾼 한국 변검의 창시자가 됐다.

불가능이 없을 것 같은 이 청년은 어려운 형편 탓에 중학교 시절부터 여러 곳에서 일을 해야 했고, 중국집에서 배달하며 중국말을 익혔다.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고 연극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결국 직업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나는 이 청년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끝없이 자기 계발을 하는 용기와 배고픈 직업을 원망하기보다 정말 좋아하며 최선을 다하는 열정, 새로운 분야에도 겁 없이 뛰어들어 자기 것으로 만드는 도전의식,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공부하는 학구열까지. 며칠 전 반갑게도 신문에 그 청년, 김동영 씨의 대문짝만한 기사를 접했다. 두 아이를 둔 가장으로 중년이 된 그는 그동안 석사학위를 따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됐고, 한국변검연구소 대표로 활동하며 해외에까지 한국 변검을 소개하는 문화전도사로 우뚝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용기 있는 삶을 참 좋아한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인생을 용감하게 개척해온 그의 행로가 요즘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이정표가 될 듯하다. 30여 년 전 맺어진 그와의 인연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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