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줄리아 리의 일생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미국 펜실베이니아 탄광촌에서 우크라이나 이민자의 딸로 태어난 줄리아 멀록. 여섯 살 때 닥친 대공황 속에서 아버지는 진폐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학교도 겨우 다닐 정도로 가난했다. 훗날 조선 왕가의 마지막 세손빈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스물한 살 때 군에 입대한 그녀는 해군 소속 화가에게 감명을 받고 제대 후 프랭클린미술학교에 들어가 그림과 디자인을 공부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의 뉴욕 설계사무소에 입사해 일의 재미에 푹 빠졌다. 이후 미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려고 스페인 유학을 결정했다.그때 MIT 출신의 한 젊은 건축가가 입사했다. 지적인 동양 청년이었다. 그녀는 진중하면서도 자상한 성격의 그에게 매료됐다. 하지만 나이가 여덟 살이나 많아 내색할 수 없었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가구를 처분하던 어느 날, 그가 집으로 찾아왔다. “떠나지 말아요.”

그의 요청을 세 번째 들은 날 그녀는 유학 대신 사랑을 택했다. 남자 이름은 이구(李玖). 그녀는 그를 ‘쿠’라고 불렀다. 고종의 손자이자 영친왕의 아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1958년 뉴욕에서 결혼한 둘은 1963년 옛 황실 인사의 귀국 허용에 따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푸른 눈의 세자빈’ 줄리아 리. 남편 말대로 ‘웃는 모습이 예쁘고 성실한’ 그녀는 시어머니 이방자 여사의 명휘원 사업을 열심히 도우며 며느리 역할을 잘 해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서양 세자빈을 못마땅해하던 종친회는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종용했다. 결국 1977년 반강제로 별거에 들어간 그녀는 1982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그 뒤로 ‘줄리아 숍’이란 의상실을 경영하며 복지사업을 계속했지만 외국인 임대주택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95년 하와이로 떠났다. 5년 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쿠를 만나고 싶다”며 한국을 다시 찾았지만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에게 주려던 조선왕가 유물과 사진 450여 점은 덕수궁박물관에 기증했다.

2005년 7월16일 남편이 도쿄의 한 호텔에서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오열했다. 그러나 장례식에 초청받지 못했다. 휠체어를 탄 채 세운상가 근처 군중 속에서 남편의 노제(路祭)를 지켜보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지난달 26일, 그녀는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혼자 생을 마감했다.

“쿠를 다시 만나 ‘(나와 헤어진 뒤) 행복했나요?’라고 물어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던 벽안의 세자빈. 부음마저 닷새가 지난 뒤에야 알려질 정도로 쓸쓸하게 살다 간 파란만장의 삶이었다. 그녀의 한국명 이주아(李珠亞)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