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이 잦았고, 휴식 기간이 길었다. 퍼트도 예전같지 않게 홀 주변을 자주 스쳤다. “다 이뤘으니 그럴 때도 됐다”는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설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골프 여제’ 박인비(30·KB금융그룹)가 19번째 우승컵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지난해 3월 HSBC위민스챔피언십 이후 12개월여 만의 우승이다. 박인비는 “통증 없이 경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다시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일자 퍼터가 가져다준 내비게이션 퍼팅

박인비는 19일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와일드파이어GC(파72·6679야드)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뱅크오브호프파운더스컵(총상금 150만달러) 4라운드를 5언더파 67타로 마쳤다. 보기 없이 버디만 5개를 잡아낸 퍼펙트 게임이었다. 최종합계 19언더파 269타를 적어낸 박인비는 노장 로라 데이비스(영국), 마리나 알렉스(미국), 에리야 쭈타누깐(태국) 등 공동 2위 그룹을 5타 차로 제치고 우승컵에 입맞춤했다.

LPGA투어 최고령 우승을 노렸던 데이비스는 이글 1개, 버디 3개를 잡으며 분전했지만 첫 홀과 마지막 홀에서 내준 보기 2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 54세5개월을 넘긴 데이비스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했다면 배스 대니얼(미국)의 46세 우승 기록을 뛰어넘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박인비의 벽이 높았다.

박인비는 18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1타 차 단독 선두로 4라운드를 시작한 박인비는 첫 홀에서 2m짜리 버디 퍼트를 꽂아넣으며 2타 차로 달아났다. 이후 지루한 10개 홀 연속 파행진을 할 때도 표정 변화 없이 때를 기다렸다. 박인비의 질주가 시작된 건 후반 12번홀부터다. 그는 15번홀까지 4홀 연속 버디를 잡아내며 2위권을 4타 차까지 따돌렸다. 2~5m 안팎의 중거리 퍼트가 쏙쏙 홀로 빨려들어갔다. 이날 퍼트 수는 28개에 불과했다. 박인비는 허리 통증으로 조기 마감한 지난 시즌에도 라운드당 평균 퍼트 수 7위(28.94개)를 달릴 만큼 퍼트감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올 시즌 처음 출전한 HSBC 대회에선 평균 29.50개로 이 부문 50위에 그쳐 ‘내비게이션 퍼트가 고장난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메이저 우승 다시 도전”

‘퍼팅 달인’ 박인비를 난조에서 구해준 건 ‘일자 퍼터(헤드 형태가 L자형인 제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일자 퍼터를 들고나왔다. 박인비는 “반달퍼터(말렛형 퍼터)를 쓸 때는 내가 어떤 점이 잘 안 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며 “무엇이 잘못됐는지 더 잘 알아내기 위해 변화가 필요했는데, 메이저대회 직전에 교체하면 부담이 있어서 시간 여유를 두고 바꿔봤다”고 설명했다. 박인비는 “공이 지나가는 길과 움직임이 잘 보였다”며 교체 효과에 만족스러워했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긴 휴식 시간도 도움이 됐다는 게 박인비의 자평이다. 그는 지난해 8월 브리티시여자오픈 이후 허리 통증이 악화돼 4개월여 남은 시즌을 통째로 접었다. 그는 “부상 때문에 쉬게 됐을 때는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나’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며 “지난 20년간 보지 못했던 한국의 단풍과 가을을 볼 수 있었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1988년 7월12일생인 그는 약 4개월 뒤 만 30세가 된다. 박인비는 “새로운 시작점에서 우승이 좋은 신호탄이 된 것 같다”며 “30대에도 골프와 삶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즌 첫 승 물꼬를 튼 박인비는 메이저 승수 추가 욕심도 드러냈다. 그는 “예상보다 빨리 우승 목표를 이뤘다”며 “첫 메이저대회인 ANA인스퍼레이션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통산 19승 가운데 7승을 메이저대회 우승컵으로 채운 박인비는 2015년 브리티시여자오픈 우승으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생애 통산 4대 메이저 우승)을 완성했으며 2016년에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까지 따내 골프 사상 최초의 ‘골든슬램’을 달성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