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을 거부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비 오희상(1763~1833)은 거문고를 잘 탔는데, 연주할 때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강한 바람이 불고 비가 심하게 내릴 때, 속된 사람을 앞에 두고 있을 때, 저잣거리에 있을 때, 앉은 자세가 적당하지 않을 때,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을 때는 연주하지 않는다는 ‘오불탄(五不彈)’이다.

다섯 가지 자세를 갖췄을 때 연주한다는 ‘오능(五能)’도 있었다. 자세는 안정감 있게, 시선은 한 곳에, 생각은 한가롭게, 정신을 맑게, 손가락은 견고하게 한다는 원칙이다.

오불탄과 오능의 자세에서 음악을 대하는 선조들의 진정성과 진지함을 볼 수 있다. 방송에서 국악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우리 전통음악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는 송지원 서울대 한국학연구원 교수가 《한국 음악의 거장들-그 천년의 소리를 듣다》에서 우리 역사 속의 진정한 음악인 52명을 소개했다. 삶과 학문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게 음악이라는 자세를 가졌던 선조들이 음악을 상품 또는 인스턴트 식품으로 생각하고 소비하는 현대인을 꾸짖는 듯하다.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음악인 우륵은 정치적 망명을 통해 가야금을 전파했다. 사치와 방탕에 젖어 있던 가야를 떠나 신라로 망명한 우륵은 가야금의 ‘도(道)’를 전하기 위해 왔다는 뜻을 신라 진흥왕에게 전했다. 왕은 ‘망한 나라의 음악을 취해선 안 된다’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우륵을 대접했다. ‘반역자’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자신의 음악을 후대에 남기려는 진심을 알아준 것이다. 우륵은 세 명의 제자를 받았고, 그들의 음악에 대해 “즐거우나 지나치지 않고, 슬프지만 비탄에 젖게 하지는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는 평을 남겼다. 이 말은 지금도 ‘바른 음악’에 대한 기준으로 계승되고 있다.

삶으로 역사를 전하는 음악인도 많다. 명나라 궁녀 굴저(屈姐)는 병자호란 뒤 청나라로 압송된 소현세자가 돌아올 때 함께 조선으로 왔다. 그는 뛰어난 비파 실력으로 궁중 내에서 음악과 무용을 관장하던 장악원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멸망한 조국 명나라를 항상 그리워하던 굴저는 효종의 북벌 계획을 들으며 명나라가 다시 일어나리라 믿었고 “내가 죽으면 북벌하러 가는 조선군을 볼 수 있게 서쪽 국경길에 묻어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하지만 결국 북벌도, 명나라의 부활도 이뤄지지 않았고 그의 비파마저 우물 관리용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전의 생활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다. 가야금을 배우려거든 장가부터 들고 오라는 스승을 이해할 수 없었던 민득량은 혼기가 차고서야 그 뜻을 알게 됐다. 가난한 음악가에게 아무도 딸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남학의 이야기는 조선시대의 ‘외모 지상주의’를 보여준다. 남학은 못생긴 얼굴 때문에 어두운 기생방에 들어앉아 노래를 했는데, 그 목소리만 듣고 기생들이 다정하게 굴었다고 한다.

책에 등장하는 선조들의 삶이 아름다운 건 비단 음악의 대가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삶의 이치에 이르는 연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음악이 화려하지도 않던 시절, 고단한 길을 부단히 걸어갔던 이들의 삶을 보면 경건함과 묵직함을 느끼게 된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