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 유방은 항우가 부친을 인질로 잡아 삶아 죽이겠다고 협박했을 때 그 국 한 사발을 달라며 태연한 척했다. 초나라 병사에게 쫓길 때 수레가 무거워 달리지 못하자 자식들을 세 번이나 발로 차 마차에서 밀어냈다.

항우를 사면초가에 몰아넣고 천하를 얻은 뒤에는 한신과 팽월을 토사구팽했다. 또 사마의는 과부와 고아까지 사기의 대상으로 삼는 등 음흉하고 뻔뻔했다. 초나라 유비는 다혈질이었지만 철저한 이미지 관리를 통해 인자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천하를 놓고 다투는 제왕의 처세술이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불리할 때는 고개를 숙이며 납작 엎드리고,유리할 때는 강하게 밀고 나가 짓밟는 것이다.

중국 청나라 말기 이종오란 사람이 남긴 《후흑학(厚黑學)》은 중국 역사에 이름을 남긴 통치자들의 처세 비법을 '면후심흑(面厚心黑)' 즉 '두꺼운 얼굴(面厚)'과 '음흉한 속마음(心黑)'으로 풀어낸 책이다. 큰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불리한 문제는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을 가볍게 생각하며 틀려도 사과하지 않는 철면피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철면피'만이 영웅호걸이 됐다는 주장이다.

신동준 씨가 펴낸 《후흑학-승자의 역사를 만드는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은 이종오의 《후흑학》을 탐구한 책이다. 이종오 《후흑학》의 요체를 압축해 소개하고,관직을 얻거나 유지하는 데 필요한 후흑술을 재정비해 글로벌 전쟁터에서 싸우는 기업총수 등이 마땅히 새겨야 할 9가지 처세술로 압축해 소개하고 있다.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유방과 항우,장량과 한신,조조와 유비,손권과 사마의,장제스와 마오쩌둥 등 오월동주부터 신중국의 개막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륙을 누볐던 인물들의 후흑사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저자는 "후흑학은 중국인들이 역사의 굴곡을 헤쳐 나오기 위해 체득한 생존술"이라며 "오늘날 중국을 G2 반열에 올린 가장 주요한 원동력"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또 "영웅의 역사에도 간사한 계책이 넘치고 천하의 성인도 상대의 목을 꺾는 비열한 술수를 썼다"며 "세계 권력의 축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이동하고 있는 만큼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한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