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니 문명이니 하는 주제는 대체로 복잡하고 딱딱하며 어렵다. 거기에다 철학과 신학까지 얹어 놓으면 전공자가 아닌 한 부담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신》(휴머니스트,3만7000원)은 다르다. 860여쪽의 두툼하고 묵직한 책의 본문 한 쪽을 다 읽기도 전에 귀가 솔깃해진다. 철학과 신학을 문학 · 역사 · 미술 · 음악 · 건축 등과 버무린 데다 독자와 마주앉아 담소하듯 조근조근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이다. 저자인 철학자 김용규씨(58)의 서울 청파동 자택을 찾았다.

"어떤 서양사람이 동양 문명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면 도(道)나 인의예지(仁義禮智),충효 같은 개념을 먼저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서양을 이해하려면 신,이성,사랑 같은 그들의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지요. 특히 신을 통해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건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정점은 물론 그 저변까지 잘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와 튀빙겐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김씨는 흥미진진한 지식소설 《알도와 떠도는 사원》,13편의 문학작품을 실마리 삼아 철학의 길과 삶의 해법을 제시한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등 대중적인 인문서를 써온 철학자다. 그는 배관이나 급수펌프,정수장도 없이 수도꼭지만 벽에 꽂는다고 물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것처럼 서양이 추구해 온 보편적 가치와 심층을 모르고선 서양 문명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지적한다.

김씨는 이 책에서 서양의 신,즉 기독교의 하나님은 누구이며 어떻게 존재하는지부터 시작해 신과 인간의 관계와 존재물의 속성,창조주와 피조물의 의미,신의 섭리와 자기희생,신의 유일성과 인간의 연대성 등 다양한 주제를 넓고 깊게 펴보인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로마의 시스티나 대성당 천장화 '천지창조'에 나오는 노인은 성서에 나오는 야훼가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며,아담은 아폴론이라는 설명이 흥미롭다.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공부했고,라파엘로는 제자들을 그리스로 보내 고대 미술품을 모사해 오게 했다. 그 결과 성서 이야기를 다룬 작품에도 그리스 문화가 자연스럽게 혼합돼 원래 형상이 없는 신의 모습이 제우스로 표현됐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서양인들조차 그들 문명의 근간인 신에 대해 심한 편견과 왜곡된 개념을 갖고 있어요. 가령 과학자 데이비드 밀스는 《우주에는 신이 없다》,스티븐 호킹은 《위대한 설계》를 통해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2000년 동안 그 어느 신학자도 우주 공간에 신이 있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신은 초월적 존재라 우주 밖에 있으니까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구약성서의 말씀 중 '태초'를 '아주 오래 전'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으로 봤습니다. 신은 시간 밖에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얘기예요. 그런데도 과학자들이 우주 공간에 신이 없다며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벽에 수도꼭지만 꽂아 놓고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죠."

김씨는 "신이라는 이름으로 얘기되던 보편적 가치들을 근대 이후 너무 일찍 잊어버리는 바람에 허무주의 · 냉소주의,물질주의 등의 현대적 병폐들이 생겨났다"며 전근대와 근대,탈근대의 상반 · 대립하는 가치와 지식,충돌하는 문명 간의 화해를 위한 방안도 제시한다. 그 핵심은 '이것이냐,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는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이를 빌미로 이교도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 그가 어떤 종교의 신자든 사실상 그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만든 악마적 이데올로기에 빠져 기만을 일삼는 사람들이라 한 번쯤 시스티나 대성당에 가서 미켈란젤로가 남긴 메시지를 보라"고 덧붙였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