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다시 보기] (5) 인구 변화와 노동자 임금‥흑사병 덕에 풍요로운 생활 누린 노동자들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은 1288년 건립돼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유서 깊은 병원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뛰어난 미술가요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체를 해부하면서 학문과 예술의 기초를 닦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수십 년 전의 일이지만 이 병원은 경제사적으로 매우 유용한 몇몇 자료를 공개해 또다시 주목을 끌었다. 수백 년 전 이 병원에 고용됐던 노동자들의 임금 지급대장도 그 중 하나였다. 학자들이 이 자료를 이용해 14세기 흑사병 창궐 직전 노동자들의 임금을 당시 물가로 환산해보니 이들이 하루에 섭취할 수 있는 음식물의 총 열량은 1000㎉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의 노동 강도를 감안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본 열량 3500㎉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 수준의 임금으로는 인간이 정상적인 신체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단백질과 지방마저 섭취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분석 결과는 왜 이 시대 유골들의 상당수가 영양실조,골연화증,비타민 결핍 등의 증세를 가지고 있었는지,왜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이 고작 160㎝에 불과했는지를 설명해준다.

1347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흑사병은 폐(肺) 페스트의 일종으로 높은 전염력과 치사율을 가지고 있었다. 삽시간에 유럽 전체로 퍼진 흑사병으로 불과 3년 만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갔다. 그 뒤에도 흑사병은 여러 차례 유럽을 덮쳤으며 그때마다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았다. 학자들은 15세기 중반 유럽의 인구가 흑사병 창궐 이전보다 적어도 절반 이상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심지어는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말은 헛말이었다. 독일 뤼베크 지방의 통계에 따르면 도시 전체의 사망률은 50%이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가진 부자들만 놓고 보면 25%에 불과했다. 이웃 프랑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시몽 드 쿠벵이라는 의사는 이렇게 적었다.

'불충분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먼저 죽어갔다. 그들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삶과 죽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그러나 죽음은 영주와 기사,그리고 판사들을 비켜갔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안락한 삶이 있었다. '

사람들은 정신적인 충격과 혼란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이 비극적인 상황이 가지고 올 역설적인 반전을 사람들이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노동력 감소로 인해 도시 노동자들의 임금은 무려 2.5배까지 올랐으며 농촌 노동자들의 임금도 2배 가까이 올랐다. 그들은 과거에는 감히 기대하지 못했던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됐다. 밀로 만든 빵을 먹을 수 있었고,돼지고기와 닭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으며,가끔은 와인까지 마실 수 있게 됐다. 또 도시의 높은 임금은 농노들의 탈출을 유혹하여 결과적으로 농노 해방을 촉진시키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16세기 농민,노동자들의 삶은 정반대였다. 인구가 2배로 늘었기 때문이었다. 영세농의 자식들은 상당수가 농토 부족으로 인해 임금노동자가 됐다. 영국에서는 인클로저와 전환농업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집약적인 상업적 농업경영이 시작되면서 적지 않은 소작인들이 퇴출됐다. 영세농들이 부족한 영농자금을 고리로 빌렸다가 땅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렇게 해서 임금노동자들의 비율은 2배 이상 늘어났다. 임금노동자의 증가는 결과적으로 그들의 임금을 떨어뜨리는 직격탄 역할을 했다. 1500년의 임금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17세기 전반 서유럽 노동자들의 임금지수는 50 내지 40 수준으로 떨어졌다.

16세기 가격혁명은 사회적 · 경제적으로 양극화 현상을 가져왔다.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경영 마인드로 무장한 새로운 지주집단이 형성돼 과감한 자본 투자와 합리적 경영으로 자본력을 키워갔으며,다른 한편으로는 임금노동자가 양산돼 값싼 노동력이 시장에 충분히 공급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바야흐로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세계가 열리게 된 것이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