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가 단 하루 산책에 나서지 않았던 날은 프랑스에서 혁명이 터졌다는 급보가 전해진 바로 그날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행군하는 모습을 보고 "보라, '살아있는 역사'가 지나가고 있다"고 말한 사람은 헤겔이었다. 역사의 전환기를 살면서 격랑의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것도 짧은 우리 인생에 주어진 소중한 행운이다. 지금 우리가 목격한 것들 역시 칸트가 듣고 헤겔이 보았던 그 놀라운 소식들에 결코 못지않은 역사적 장면들이다.

중국 건국 60주년 퍼레이드는 가난에 찌든 굴곡진 나라가 어떻게 국민적 열망을 결집하고 굴욕의 몸을 일으켜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지를 잘 보여준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물론 역사적 무대라는 호사가적 평가 뒤에는 G2로 성장해 오른 중국에 대한 내밀한 질시와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숨길 수 없을 테다. 중국의 퍼레이드는 동아시아에서 거대한 에너지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기념비적 사건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른 어떤 고매한 가치도 없는 공허함 그 자체이기도 했다.

힘의 존재를 폭발적 형태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은 내부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요 일당독재가 모순에 봉착하고 있음을 은폐하는 시나리오일 수도 있다. 치명적 콤플렉스가 만들어내는 속내 마음의 강력한 반작용 말이다. 후진타오 주석은 고양된 목소리로 "사회주의의 성공"을 선언했지만 중국의 성공이 사회주의의 성공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성공이며, 중국 공산당 강령의 성공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성공이라는 점을 더는 숨길 수 없다. 숨길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장엄한 행진으로 이를 덮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곳에는 권력이 뿜어내는 거친 숨결만이 느껴질 뿐 부드럽게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감동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20만의 군중 동원과 거석문화적 신비주의로 덧칠한 놀라운 집체 행사는 20세기를 넘기면서 이미 박물관으로 유폐된 대중 정치미학의 낡은 구조물이다. 오늘날 중국의 퍼레이드가 그것의 이복 동생인 북한의 아리랑과 다를 바 없는 외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해야 할 만큼 중국은 이미 작은 나라가 아니다. 오직 스스로는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이것이 딱한 일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국의 힘이 시대착오적 일당 독재에 의해 장악돼 있다는 것이다. 이 이종교배적 상황은 시장경제와 민주화의 병진이라는 근대화의 일반 법칙에 대한 새로운 반대증거인가 아니면 다만 폭발의 시각을 끌어당기고 있을 뿐인 모순 덩어리인가. 세계가 중국을 보는 관점에서 극적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다. 중국은 질서정연하게 세계사적 보편국가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덩치만 우라지게 키운 개도국에 불과해 넘치는 에너지를 언젠가는 외부를 향해 폭발시킬 것인가로 세계의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것이다.

중국이 경제와 산업을 돌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초 자원을 매입하는 것조차 곧바로 중국의 세계 장악 음모로 돌변해버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이 세계 경제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물론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아니 지금의 중국은 세계화된 시장경제가 만들어 내는 생산성의 폭발 그 자체를 의미하는, 헤겔식으로 표현하면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국제 교역의 확대가 세계 평화의 기초가 된다"고 썼다. 그러나 중국의 저 날카로운 군사 퍼레이드는 진정 평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돌아보면 주변의 이민족들이 차례로 중국을 삼켰으나 결국은 거대한 용광로 속으로 녹아버리고 말았던 것은 중화가 갖는 유교 보편주의라는 연성가치의 파워 때문이었다. 보편 가치라는 전통은 잊은 채 지금 중국은 미숙한 청년처럼 근육질 몸매에 기름칠이나 하고 있다. 중국의 친구들이여!


논설위원 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