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투쟁은 하지 않겠다던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이 5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무효화를 내세우며 정치투쟁을 선언하자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위원장은 "한·미 FTA는 우리 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입힐 것"이라며 "노동자를 재앙에서 구하기 위해 총력 투쟁에 나선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한·미 FTA가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어 민주노총의 이러한 명분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실정이다.

◆민주노총 내 복잡한 권력구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강조하던 이 위원장은 왜 갑작스레 길거리투쟁에 나선다고 했을까.

민주노총 내부의 권력 흐름을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민주노총에는 금속노조,공무원노조,공공운수노련,화학섬유노련 등 15개 산별노조·산별연맹이 있고 75만2000여명의 노조원이 가입해 있다.

이 위원장은 조직체계상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며 대내외 활동을 할 때도 민주노총 수장으로서 대접받는다.

하지만 조직 내 권력구도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복잡하다.

현재 민주노총의 15개 가맹조직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곳은 금속산별노조로 민주노총 투쟁의 선봉대 역할을 해왔다.

지난해 현대차 기아차 등 대기업 노조가 대거 가세하면서 조직 내 파워가 막강해졌다.

금속노조는 지난달 10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한·미 FTA협정 무효화 총파업투쟁을 결의했다.

이 과정에서 이 위원장의 정치파업 금지 약속은 검토 대상도 되지 않았다.

노동전문가들은 "노동현장에선 조직을 직접 거느리고 있는 산별이나 기업별 노조의 파워가 셀 수밖에 없다"며 "따라서 민주노총 상층부가 오히려 산하 노조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강경파 득세한 금속노조

그렇다면 민주노총 내 최대 권력자는 이 위원장이 아니라 금속노조를 이끄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금속노조 내 실세는 누구일까.

정갑득 금속노조위원장으로 보기는 힘들다.

금속노조 핵심 간부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회 28명의 성향을 파악해보면 어디로 권력이 쏠려 있는지 알 수 있다.

중집위는 위원장 1명과 부위원장 7명,사무처장 1명,전국 19개 지부장 등 28명으로 구성돼있다.

이 가운데 온건파인 국민파는 정 위원장을 비롯해 11명이고,강경파 16명(중앙파 10명,현장파 6명),무소속 1명 등으로 강경파가 절반을 훌쩍 넘고 있다.

결국 조직 내 세력이 약한 국민파 계열의 정 위원장은 강경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정 위원장은 한·미 FTA 총파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으나 강경파의 입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튼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부 관계자는 "온건노선의 정 위원장이 아무리 실리주의를 걷고 싶어도 강경파가 득세하는 현 상황에서 쉽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정 위원장은 좌파 강경노선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금속노조는 좌파세력이 주도하고 있고 민주노총 전체의 운동노선도 이들에 의해 끌려다닌다고 볼 수 있다.

◆총력투쟁 가능할까

민주노총은 19일부터 21일 사이 총파업 찬반 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지만 노동 현장의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하다.

한·미 FTA 문제가 현장 노조원들의 실익과는 전혀 무관한 사안인 만큼 참여 열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탓이다.

또 매년 정치 파업에 큰 손실을 보아 온 현대자동차를 비롯 많은 기업들이 불법 정치파업에 대해 법과 원칙에 의거해 강력 대응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총파업에 대한 노동 현장의 냉랭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실제 투표 결과는 찬성 쪽으로 결말이 날 것으로 보인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조합원들의 의견에 상관 없이 투표 결과를 조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부와 재계가 선거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시민사회단체 등이 참여하는 선거관리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