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익중 작가 "공공미술은 명랑한 혁명…3인치 예술로 세상 연결하겠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아름다운 강산' 앞에 선 강익중
25년전 3인치 조각 7500개로 작업
공공미술가로 전환점 맞은 작품
맨해튼 한글벽·이집트 한글신전
세계적인 설치미술 작가로 명성
바람·햇살 기운 받은 안테나 역할
건물옥상에 쇠젓가락 설치하고 싶어
전세계에 흩어진 한글벽은 하나의 점
점에서 선으로 이어 입체공간 만들 것
25년전 3인치 조각 7500개로 작업
공공미술가로 전환점 맞은 작품
맨해튼 한글벽·이집트 한글신전
세계적인 설치미술 작가로 명성
바람·햇살 기운 받은 안테나 역할
건물옥상에 쇠젓가락 설치하고 싶어
전세계에 흩어진 한글벽은 하나의 점
점에서 선으로 이어 입체공간 만들 것
빌딩에 들어선 사람들은 로비에서 자연스럽게 분기된다. 위로 올라가 시각예술을 사유할 것인가, 아래로 내려가 영상예술을 감상할 것인가. 이 순간 뭔가 시선을 붙든다. 로비 벽면에 길게 펼쳐진 가로 31m, 세로 3m의 공공미술작품 ‘아름다운 강산’(2000·2010)이다. 가로, 세로 3인치의 작은 조각 7500개가 모여 만든 이 작품은 단순한 장식에 그치지 않는다. 한글로 쓰인 ‘겸인지용’ 같은 말과 갖가지 공동체 풍경이 담긴 작품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는 듯하다.
지난 2일 무더위를 뚫고 한 신사가 빌딩에 들어와 ‘아름다운 강산’을 한참 바라봤다. 작품을 만든 강익중 작가(65)다. 작품 앞에서 만난 그는 40년 넘게 미국 뉴욕에 머물고 있는 데다 바쁜 활동으로 이 작품을 거의 10년 만에 다시 만났다고 했다. 그새 그는 뉴욕 맨해튼에 거대한 한글벽을 세우고, 이집트 피라미드 건너편에 한글신전을 지어 세계적인 설치미술가로 거듭났다. 치열했던 젊은 날 제작한 작품이 마치 등대처럼 25년째 항구적으로 전시되며 타인의 일상에 영감을 주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상하게 쑥스러워요. 그런데 또 참 좋아요. 잘 익은 와인처럼요.”
“1996년 한국에서 첫 귀국전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 요청을 받게 됐어요. 마침 이 무렵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대형 벽화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었죠. 새로 지어지는 빌딩에 맞춰 제 남은 에너지를 모두 쏟아붓자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 ‘아름다운 강산’이었나요.
“태어나고 자란 장소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은 바람이 있잖아요. 항상 그리워하는 곳이기도 하고, 오래전부터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올 장소니까요. 공공미술이란 건 ‘명랑한 혁명’입니다. 작가에겐 공동체에 속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고, 대중에겐 서로가 연결된 존재임을 재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희망을 건넨다’는 믿음에서 나온 거죠.”
강익중은 서울부터 고향인 충북 청주는 물론 미국과 영국, 독일, 중국 등 전 세계 각지에 큼지막한 공공미술 작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강익중의 기념비적 공공미술 작품을 꼽으라면 늘 앞단에 ‘아름다운 강산’이 거론된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교류하며 작업하고, 199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상을 받는 등 나름 잘나가던 작가인 강익중의 시선이 ‘나’에서 ‘우리’로 전환한 시점에 만들어진 초기작이기 때문이다.
▷2000년을 전후해 모두가 향유하는 공공미술 작품을 선보이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즈음부터 10년 정도는 미술관이나 화랑 전시를 조금 미루고 공공미술에 매진했어요. 공공미술을 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면 1996년 김환기 선생님의 배우자인 김향안 여사를 모시고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가 되겠네요. 그분이 제게 ‘지금 하는 일이 개인적으로 이익이 되는지보다 민족과 역사, 세계에 좋은지를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런 생각을 품고 있으니 김환기가 세계적인 작가가 됐구나 싶었어요. 예술가로서 30세기에 벌어질 일을 상상하고 실험하던 백남준 선생님에게 느꼈던 그런 충격을 또다시 받게 된 거죠.”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하나로 연결해보자’라고 한 거죠. 공공미술가로서 전환점이 된 작품이라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네요.”
강익중은 ‘아름다운 강산’이 가능했던 배경에 고(故) 이선애 세화예술문화재단 초대 이사장을 꼽는다. 예술에 대한 확신,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철학, 공간을 예술로 채워 넣겠다는 고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작품이란 뜻에서다. 백남준에게서 예술의 실험정신을, 김향안 여사에게서 작가의 자세를 봤다면 이 전 이사장에게서 예술과 사회가 만나는 방식을 배웠단 것이다. 태광그룹 창업주인 이임용 선대회장의 배우자인 이 전 이사장은 집착이나 대가 없이 베풀라는 뜻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철학을 바탕으로 메세나 활동을 펼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업하면서 인상적인 기억이 있습니까.
“‘알아차림’이란 말을 좋아해요. 어떤 결심이라기보단 순간의 숨결처럼 저절로 오는 거죠. 예술은 그 결을 따라 세상을 알아차리는 창문입니다. 작업을 마쳤는데 당시 이선애 이사장이 질문을 했어요.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게 없냐는 거였죠. 뭐랄까 서대문에 도인이 있는 것 같았어요. 작품의 화룡점정으로 건물 옥상에 바람과 햇살의 기운을 받는 안테나 역할의 쇠젓가락을 설치하고 싶었거든요. 그걸 알아준 거죠. 여러 이유로 실현되진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곳에 꼭 완성하고 싶어요.”
▷‘3인치 회화’로 시작한 ‘아름다운 강산’의 세계관은 한글을 매개로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뉴욕에 대형 한글벽을 세운 건 개인적으로 감회가 큰 순간이었습니다. 하나의 픽셀인 3인치 회화가 모여 ‘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었듯, 제게 한글벽은 하나의 점이에요. 서울에도, 영국 런던에도 이런 점을 찍어서 선을 긋고, 전 세계에 그려진 선을 이어 한글을 매개로 한 입체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 계획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유승목 기자
※3인치 회화와 한글, 달항아리로 수놓은 강익중의 40년에 걸친 화업과 남은 예술적 목표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는 이달 말 발간되는 아르떼매거진 15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