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을 맞아 빈집을 노린 절도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 금호동의 한 아파트 가스관에 빈집털이범을 막기 위한 가시철망이 설치돼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을 맞아 빈집을 노린 절도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 금호동의 한 아파트 가스관에 빈집털이범을 막기 위한 가시철망이 설치돼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지난달 20일 오후 8시께 서울 평창동 고급 주택가 골목 어귀에 작업복 차림의 세 남자가 모였다. 그들은 잠시 흩어져 해가 질 때까지 30분 동안 일대 주택가를 돌며 한 집 한 집 조심스럽게 살폈다. 해 진 뒤에도 불이 켜지지 않은 집 앞에 다시 모인 이들은 가지고 온 비닐봉지에서 돌멩이를 꺼내 집 안으로 던진 뒤 몸을 급히 숨겼다. 채 3분도 안 돼 무인경비업체 차량이 출동했다. 20여분 동안 침입 등 이상 여부를 확인한 뒤 경비업체 차량이 돌아가자 다시 돌을 집안으로 던졌다. 한 차례 더 무인경비업체 차량이 출동했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자 5분도 머물지 않고 떠났다. 어둠 속에서 나온 세 남자는 또다시 돌을 집으로 던졌고, 경비업체 차량은 오지 않았다. 이들은 준비해온 사다리로 담을 넘고 노루발장도리(일명 빠루)로 현관문을 딴 뒤 귀금속을 챙겨 사라졌다.

위 사례는 서울의 한 경찰서 유치장에 잡혀 있는 전문털이범과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아 빈집을 노린 절도사건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고가 주택과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부촌은 빈집털이범의 주요 대상이다. 철통 같은 무인경비시스템도 무력화시키는 절도범들의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강남 종로 영등포 등 서울지역 8개 일선 경찰서의 베테랑 형사와 전문털이범을 만나 취재한 결과, 전문털이범들은 모두 잠든 심야가 아닌 해질녘 불이 켜지지 않은 아파트와 주택을 범죄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조사됐다. 아파트는 계단식보다는 보안시스템이 허술해 쉽게 침입할 수 있는 복도식 아파트를 ‘선호’했다. 빈집털이범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폐쇄회로TV(CCTV)다. 서울 강남권 아파트를 노리는 절도범들은 CCTV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낸다. 서울 평창동 등 전통 부촌의 경비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양치기 소년 수법’엔 담당형사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초저녁 불꺼진 주택을 노린다

[경찰팀 리포트] 전기 계량기가 '천천히' 돌아가면 빈집털이범은 '발 빠르게' 돌아다닌다
아파트 빈집털이범들이 가장 선호하는 시간대는 해 질 무렵이다. 범행 대상 아파트를 계속 관찰하고 있다가 해가 떨어져도 계속 불이 꺼져 있는 집을 노려 침입을 시도한다. 특히 송파구와 양천구 목동 등 아파트 밀집 지역의 경우 해가 진 후 아파트 뒷면으로 돌아가서 가스배관을 타고 고층 아파트로 침입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이들이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가 창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수초면 충분하다는 게 담당 경찰들의 얘기다. 한 경찰은 “이웃끼리 점차 소원해지는 최근의 사회 현상이 빈집털이 기승과 무관하지 않다”며 “특히 복도식 아파트는 범죄에 취약하면서도 이웃 주민끼리 서로 휴가를 갔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전기계량기가 느리게 도는 집을 표적으로 삼아 빈집 여부를 확인한 후 금품을 훔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 5월 서울 방배경찰서는 가스계량기가 느리게 도는 집을 골라 드라이버로 현관문을 따고 들어가는 수법으로 61회에 걸쳐 1억8000만원 상당의 귀금속을 턴 김모씨(41)를 구속한 바 있다.

○평창동 등 전통 부촌…‘양치기 소년’ 수법 등장

서울 평창동 부암동 가회동은 전통 부자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휴가로 길게는 한 달 이상을 비우는 곳도 허다하다. 고가 보석이나 현금이 많고 털려도 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 조직적인 전문털이범의 주요 범행 대상이다. 하지만 그만큼 보안시설이 철저하다. 보안업체 무인경비 시스템 설치는 기본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출동한 보안업체 직원들에게 붙잡힐 위험이 그만큼 높다.

철통 같은 보안시스템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전문털이범들이 고안해 낸 것은 ‘양치기 소년’ 수법이다. 보안업체 요원이 출동했다가 허탕을 치도록 반복해서 무인감지기 근처에 돌을 던진다. ‘도둑이 나타났다’는 감지기의 알림이 보안업체 직원들에게 양치기 소년의 장난으로 느껴지는 순간, 도둑들은 행동을 개시해 빈집을 털고 사라진다.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전문털이범을 잡고 보면 영화에서처럼 적외선감지기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첨단 장비로 빈집을 털기보단 이처럼 허점을 노린 지능 범죄가 더 많다”고 전했다.

○강남 절도범…CCTV와의 전쟁

고가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서울 강남권 주택가는 휴가철 빈집털이범들이 노리는 또 다른 대상이다. 한 번만 성공해도 그만큼 얻는 게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중삼중의 보안시스템을 뚫어야 한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는 외부인의 침입을 좀체 허용하지 않는 무인경비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전문털이범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CCTV다. 최근 전문털이범들은 아예 범행 대상으로 삼은 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도주 차량을 세워 두고 택시를 이용해 CCTV의 추적을 피한다. 4월 강남경찰서에 검거된 정모씨(34)는 지방에서 렌터카를 빌린 뒤 범행 대상 아파트에서 10㎞ 이상 떨어진 곳에 주차한 후 택시를 타고 이동, CCTV 추적을 피했다. 정씨는 외부인 출입통제 시스템이 없는 아파트만 털었다. 양쪽 집 초인종을 눌러 빈집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빠루로 도어록을 제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10초다. 정씨가 이런 수법으로 1년여간 훔친 금품은 8억2000만원에 달했다.

오지형 종로경찰서 형사과장은 “인천에 있는 한 오래된 아파트에 계속 도난 범죄가 발생해 가봤더니 CCTV가 없었다”며 “범행 발생 후 CCTV를 설치했더니 절도 범죄가 확 줄었다”고 말했다.

○복도식 아파트가 먹잇감

보안장치가 별도로 설치돼 있지 않은 서울 강남구 청담·논현동 일대의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도 빈집털이범들의 단골 무대다. 3월 서초경찰서는 보석감정용 안경을 지니고 현장을 털던 빈집털이범 안모씨(46)를 구속했다. 안씨는 서초구 일대 복도식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절단기로 방범창을 자르고 들어가 7차례에 걸쳐 5000만원 상당의 귀금속과 현금을 훔쳤다. 적은 범행 횟수에도 안씨가 5000만원에 달하는 금품을 훔칠 수 있었던 것은 보석감정용 안경이 한몫했다. 그는 아파트에 침입한 후 돌연 보석감별사로 변신, 진품 여부를 구별하고 돈 되는 물건만 주머니에 담아 현장을 빠져나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빠루를 이용한 빈집털이도 유행이다. 공사장에서 사용되는 이 도구는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못을 뽑는 데 사용하는데, 이를 이용해 아파트 현관문을 수초 만에 연다. 이 도구를 이용하면 전자식 자물쇠도 무용지물이다.

홍선표/이지훈/김태호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