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림의 2021년 작품 ‘삶의 한가운데’. 학고재갤러리 제공
채림의 2021년 작품 ‘삶의 한가운데’. 학고재갤러리 제공
검은 바탕 중앙에 이국의 등롱을 연상시키는 현란한 색채를 띤 형상이 가로로 길게 펼쳐져 있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도시의 조명 불빛 같기도 하고, 전설 속 용과 같은 불가해한 존재가 지나가는 광경 같기도 하다. 아래쪽으로 번진 색채는 독특한 질감과 광택이 영락없이 밤바다에 비친 빛을 떠올리게 한다. 옻칠로 그림을 그리는 채림(58)의 ‘삶의 한가운데’(2021년)다.

옻과 자개, 한지 등 한국적인 소재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두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의 채림 개인전 ‘옻, 삶의 한가운데’와 서울 반포동 스페이스이수의 권중모 개인전 ‘라이트 하우스’다.

채림의 개인전에서는 옻과 한지, 귀금속 등으로 그린 회화 144점을 만날 수 있다. 그는 2000년부터 보석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2017년 12월 학고재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현대미술 작가로 변신했다. “보석은 장식물이기 때문에 몸에 지니지 않으면 금고에 들어갑니다. 그게 싫어서 항상 사람들의 눈에 띌 수 있는 보석세공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작품 활동 중 한국적인 소재인 옻의 매력을 느끼면서 그림에 옻칠을 결합하게 됐습니다.”

채림의 작업은 옻나무 유액에 전통 안료를 섞는 데서 시작된다. 이를 목판 위에 칠하고 말리기를 30~40회 반복한다. 작업은 고되다. 옻이 올라 얼굴에 열꽃이 필 때도 많다. 하지만 거무죽죽하던 옻칠이 갑자기 마법처럼 자신의 색채를 발하는 순간의 감동은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옻은 적정 온도와 습도를 만나면 꽃처럼 피어납니다. 우리의 삶도 코로나19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옻처럼 피어나기 바랍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태칠(紙胎漆)을 통한 ‘대지’ 연작이 눈에 띈다. 지태칠은 한지로 만든 오브제에 점성과 접착력이 강한 옻칠을 해 마감하는 방식이다. 대지를 표현하는 한지의 거친 듯 부드러운 질감에서는 한국적인 정서가 진하게 느껴진다. 작가가 제주도의 풍경을 파스텔 톤의 옻칠로 담아낸 ‘멀리에서’ 연작, 옻칠 회화 위에 자개와 진주 등을 붙여 나무의 모습을 몽환적으로 표현한 ‘꿈결 같은’도 시선을 끈다. 전시는 6월 13일까지.

권중모의 ‘라이트하우스’.  스페이스이수 제공
권중모의 ‘라이트하우스’. 스페이스이수 제공
스페이스이수에서는 한지를 재해석해 현대적인 디자인의 조명을 만들어내는 권중모 작가(39)의 조명 작품 2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한지를 투과한 은은하고 따스한 조명 불빛은 현대적이고 세련된 조명 디자인과 결합해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권 작가는 2017년부터 한지를 소재로 한 조명을 디자인해 왔다.

“사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하는 빛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한옥 창에 붙은 한지를 보고 ‘이거다’ 싶었습니다. 빛을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밖으로 확장시키기도 하는 한지의 투과성을 재발견한 거지요.”

한지와 옻, 법랑 등의 재료로 조합한 조명은 신축 아파트나 사무실에 갖다 놔도 더없이 잘 어울린다. 전통적인 재료로 만든 작품은 옛 형태와 느낌을 살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는 게 권 작가의 설명이다.

똑같은 전구가 들어 있어도 조명마다 빛깔이 다른 것도 특징이다. 조명을 둘러싼 한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거나 배접했기 때문이다. 한복의 주름접기를 활용하거나 한지 위에 자수를 새겨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 작품도 있다. 이 덕분에 전시장에서는 다양한 한국적 소재와 기법이 저마다 자신의 빛깔을 뽐내고 있다. 전시는 6월 1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