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상장사들이 발표한 자사주 매입 규모가 작년 같은 기간보다 70%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가가 큰 폭 하락한 가운데 행동주의펀드나 소액주주의 주주환원 확대 요구가 커진 영향으로 분석된다. 약세장이 이어지면서 상당수 기업은 자사주 매입 발표 후 오히려 주가가 떨어지는 등 주가 부양 효과를 보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자사주 매입 규모 급증

자사주 매입한 기업 4곳 중 1곳, 주가 되레 하락
1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10일까지 유가증권시장에서 자사주 취득 결정을 공시한 기업(신탁계약 포함)은 36곳으로 집계됐다. 이들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1조9819억원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엔 34개 기업이 1조1540억원의 자사주 매입을 발표했다. 기업 수는 5.8% 늘었는데 매입 규모는 71.7% 급증한 것이다.

금융지주사들이 올 들어 자사주 매입 규모를 크게 늘렸다. KB금융지주는 3000억원, 하나금융지주신한지주는 각각 1500억원의 자사주 매입을 발표했다. 앞서 주주행동주의펀드인 얼라인파트너스는 지난 1월 “은행지주의 주주환원율을 50%까지 높여야 한다”며 KB 등 국내 7개 금융지주사에 공개 주주서한을 보냈다.

일반 기업 중에는 기아가 5000억원의 자사주 매입을 발표해 규모가 가장 컸다. KT(3000억원) 셀트리온(1000억원) DB하이텍(1000억원) 신세계(830억원) 등도 자사주 매입 규모가 컸다.

자사주 매입 규모는 당분간 더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행동주의펀드와 소액주주들이 자사주 매입안을 주총에 상정하라고 요구하고 있어서다. 10일 대전지방법원은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 판도라셀렉트파트너스, 아그네스 등 사모펀드들이 KT&G를 상대로 낸 ‘자기주식 취득 의안 상정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KT&G는 자사주 매입 안건을 주총에 상정하기로 했다.

25%는 오히려 주가 하락

통상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하면 주가가 상승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수급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데다 유통 주식이 줄면서 주당순이익(EPS)이 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 들어 자사주 매입을 발표한 36개 기업 중 9곳(25%)은 오히려 자사주 매입 발표 이후 주가가 5% 이상 떨어졌다. 신한지주는 자사주 매입을 공시한 지난달 8일 이후 주가가 13.8% 하락해 낙폭이 가장 컸다. KB금융(-10.4%) 하나금융지주(-11.7%)도 두 자릿수 떨어졌다. 은행주는 최근 금융당국의 대출금리 인하 압박 등으로 주주환원 정책에도 불구하고 주가는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대성에너지(-11.8%) KT(-11.4%) 셀트리온(-8.9%) 신세계(-5.0%) 등도 매입 공시 이후 약세를 보였다.

전문가들은 자사주 매입을 넘어 소각까지 이어져야 제대로 된 주가 부양 효과가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2월 말 기준 국내 상장사의 미소각 자사주는 약 74조원에 달한다. 국내 유가증권시장 및 코스닥 전체 시가총액의 약 3.3%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이나예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미소각 자사주를 5년간 균등 소각한다고 가정하면 코스피지수의 공정가치는 2590에서 3210까지 높아진다”고 했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