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김범준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김범준 기자
“삼성전자에는 이건희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 히타치나 도시바, NEC에는 그런 인물이 없었다.”

24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의 설립자 모리스 창은 최근 대만 경제지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1980년대 미국과 함께 세계 반도체산업을 주도한 일본이 1990년대 PC용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서 낙오해 한국에 밀리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다. PC에 적합한 저가·소형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집중하기로 한 이건희 삼성 회장의 과감한 결단과 전문경영인의 실행력이 한국 반도체산업의 전성기를 일궈냈다는 분석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경제계에선 삼성전자의 ‘반도체 패권’이 위태롭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반도체를 둘러싼 국가 간 전쟁에서 한국이 밀리는 데다 무엇보다 수년 뒤 미래를 내다보고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확고한 리더십이 삼성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중장기 전략의 구심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작년 8월 가석방됐지만 여전히 ‘취업제한’에 묶여 삼성전자 경영에 적극 나설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주요 경제단체는 한국 반도체산업을 지키기 위해 이 부회장 사면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조만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KSIA) 부회장은 “반도체 투자, 인수합병(M&A) 등 큰돈이 드는 사안은 기업 경영을 책임지는 리더의 결단 없이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중장기 투자전략 부재가 한국 반도체산업의 위기를 넘어 경제안보에 심각한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경쟁자의 도전이 거세지고 있는데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선 1위인 TSMC와 좀처럼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투자 계획에서도 경쟁 업체에 못 미친다. TSMC는 최대 440억달러(약 53조3200억원) 규모의 올해 설비투자(CAPEX)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반도체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금액은 171조원으로 연간 20조원에 불과하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가 올해 1분기에 매출 77조원을 올리며 분기 기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지만 주가는 여전히 부진하다”며 “투자자들은 이미 리더십 부재로 인한 삼성의 불확실한 미래를 우려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기업인을 마음껏 뛰게 하는 것이 최고의 규제 완화”라고 강조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