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셰일가스를 사들인다. 미국 ‘셰일혁명’이 세계 에너지 시장의 구도를 뒤바꾸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우디는 값싼 셰일가스를 발전용 등으로 쓰고 미국과의 동맹도 강화하겠다는 의도로 분석된다. 미국은 자국산 액화천연가스(LNG)에 보복관세를 매긴 중국을 견제하는 등 에너지 패권을 굳혀나갈 수 있게 됐다.
에너지 시장 구도 뒤바꾼 셰일혁명…사우디, 미국산 LNG 수입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22일(현지시간) 미국 셈프라에너지로부터 LNG를 연간 500만t씩 20년간 사들이기로 계약했다고 발표했다. 2013년 이후 성사된 가장 큰 규모의 에너지 거래다.

아람코는 또 셈프라에너지가 미국 텍사스주에 건설 중인 LNG 수출기지 ‘포트 아서 LNG’ 1단계 사업 지분 25%를 사들이기로 하고 세부 협의를 하고 있다. 아람코는 “LNG 시장은 세계적으로 매년 4%씩 수요량이 증가하고 있다”며 “미국과 전략적 협력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 거래는 미국의 셰일혁명이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어떻게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사우디는 미국에 가장 많은 석유를 수출해온 나라다. 하지만 미국에서 셰일오일·가스가 쏟아지면서 미국은 지난해 말 에너지 수출국으로 변신했다. 미국은 LNG 분야에 전 세계 생산 1위, 수출 4위다. 올해 수출 3위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된다. 에너지 정보업체 S&P글로벌플래츠의 이란 조지프 가스 총괄은 CNN에 “이번 프로젝트는 미국의 가스가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미국의 셰일 시추 현장에선 엄청난 양의 셰일가스가 뿜어져 나온다. 셰일오일을 끌어올리기 위해 시추관의 압력을 낮추면 기름보다 가스가 먼저 빠져나온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셰일 최대 산지인 텍사스와 노스다코타의 가스 생산량은 지난해 이후 오일 생산량이 35% 증가할 때 43% 늘어났다. 아직 이런 가스를 실어나를 충분한 파이프라인이 없어 태워버리는 셰일가스량만 하루 10억 입방피트 이상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이번 거래로 방치되는 가스를 수출할 기회를 갖게 됐다.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은 지난해 10월 “(텍사스주 일대) 퍼미안 분지에서 아주 많은 천연가스가 나온다”며 “이를 미 동북부와 유럽에 보내 가스 시장에서 러시아의 헤게모니에 도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강화하는 데 쓰겠다는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중국은 작년 9월 미국산 LNG에 10%의 보복관세를 부과했다. 다음달 1일부터 관세율을 25%로 높인다. 이런 중국 시장을 대체할 새로운 수요처를 찾은 것이다. 미국의 셰일가스는 2040년 전 세계 천연가스 공급의 60%를 차지할 전망이어서 영향력은 더 확대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사우디는 그동안 발전용 원료로 석유를 주로 써왔지만, 최근 LNG 발전량을 대폭 늘렸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더 많은 원유를 수출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조치다. 에너지 컨설팅 회사인 버클리리서치그룹의 크리스토퍼 곤클래브스 애널리스트는 “사우디는 경제적 측면에서 비용이 적게 들고 깨끗하기 때문에 가스를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우디에서도 가스를 생산하지만 생산 단가가 높아 아람코는 미국, 러시아, 호주, 아프리카 등 해외 가스전에 투자하고 있다. 아람코는 최근 “사우디의 가스 수요는 2030년까지 40% 증가할 것이고, 곧 우리 생산 능력을 초과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람코는 미국에서 사들이는 LNG 일부는 유럽, 남미 등에 수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