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근사한 카페와 맛있는 빵집, 마을도서관은 도시의 이면도로(裏面道路)에 위치합니다. 이면도로는 대개 보행로와 도로의 구분이 모호한 까닭에 이동하는 차량도 사람도 경계를 늦출 수가 없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종종 보행자와 차량이 뒤섞여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며 얽히고설키는 궤적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이러한 무질서가 오히려 평균 이동 속도를 낮춰주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이면도로는 어떤 면에선 대로변에 비해 복잡한 요소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지중화 작업이 되지 않아 전신주와 전선이 얽혀 있는 경우가 많고 차선을 제대로 그리지 않은 곳도 있죠. 우리가 골목길이라고 부르는 곳 대부분이 바로 이 ‘이면도로’이고 번듯한 대로변과 대비되는 장소인데, 그야말로 ‘도시의 이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도시가 사람이라면, 이면도로는 마치 들키고 싶지 않은 속마음 같은 것일 터이죠.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에는 양면(兩面)이 있으니 우리는 그 이면조차 품어야 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이면도로를 걷다가 ‘세상의 이면(裏面)’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실컷 등대를 구경할 수 있었던 그 여정은 ‘아버지와 함께 보낸 마지막 여행’이 됐습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은 우연히 스쳐 가는 바닷가의 등대를 쳐다보는 일조차 무척 힘들었습니다. 등대를 향한 양가감정이 생겼던 탓입니다. 다행인지 세월이 흘러 차츰 다시 등대를 마주할 수 있게 됐습니다. 등대지기가 살고 있는 그곳, 망망대해를 오가는 배와 뱃사람들이 방향을 잃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헌신적인 이미지의 등대가 왠지 모르게 뭉클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을 읽다가 성인(聖人)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anctus Franciscus Assisiensis)’를 알게 됐습니다. 그 이후로는 마치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를 한꺼번에 봤을 때처럼 참을 수 없도록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그곳은 패션의 도시 밀라노 또는 나폴리, 돌로미티가 위치한 북부 지역이나 글래디에이터가 살아 있을 것 같은 로마가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닌 아시시(Assisi)였죠.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정신을 계승한 프렌체스코 수도회도 틀림없이 평화를 사랑하고 검소하며 절제된 삶을 권장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가장 세속적인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오히려 그런 삶을 동경하게 되는 법이니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움베르토 에코와 장클로 카리에르의 대담을 담은 도서 『책의 우주』를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숭고한 정신과 검박한 삶의 태도를 동경했던 프란체스코 수사들이 스스로에게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너무나 엄격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메리카의 토착민들을 야생 동물쯤으로 간주했던 그들이 원주민 문화를 말살하고 씨를 말리는 일에 앞장섰던 것이죠. 움베르토 에코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도미니쿠스 수사들은 종교 재판의 주역들이었고, 프란체스코 수사들은 온건함의 옹호자들이었어요. 그런데 라틴아메리카에서, 마치 서부 영화에서처럼, 프란체스코 수사들은 <나쁜놈> 역을 맡고, 도미니쿠스 수사들은 <좋은 놈> 역을 맡은 거지요”
- 『책의 우주』 중
오늘날의 아메리카 대륙을 보면, 캐나다와 미국이 위치한 북아메리카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남미지역에 인디저너스(이하 토착민) 또는 혼혈인으로 추정되는 후손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어쩌면 그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토착민을 인정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기질 차이가 어떤 후손들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또는 극소수가 존재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야만의 해변에서 다시 만난 인디저너스
우리가 당연하다고 인식하는 세계사에도 이면이 존재합니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캐럴라인 도즈 페넉의 책 『야만의 해변에서』에는 서구 유럽 중심의 역사적 기록에 반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하는데요. 콜럼버스로 상징되는, 과거의 유럽인들이 발견한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도 오히려 유럽으로 모험을 감행한 토착민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책에 따르면, 토착민들은 탐험을 안내하고 중재하는 소극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학자, 정치가, 사업가와 같은 역할을 해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단순한 통역자의 역할을 넘어 두 세계와 문화를 연결하는 역할을 해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유럽적인 시각에서 서술됐던 역사’ 속에서 ‘새로운 땅’의 사람(토착민)과 문화는 미개함으로 간주되곤 했지만, 막상 그들(토착민)은 소통과 교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하죠. 문화는 물론이고, 오늘날 전 세계인의 식탁에서 없어서는 안될 식재료인 토마토부터 고추, 옥수수와 파인애플도 바로 그 토착민들의 세계로부터 전해졌으니 ‘누가 누굴 발견하고 문명을 전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괜한 걱정일지 몰라도
유니버설디자인의 일환으로 설치되는 서울 도심의 똑똑한 버스정류장 ‘스마트 쉘터’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합니다. 버스 정류장 전체가 어항처럼 통유리로 감싸여 있고 따뜻하거나 시원한 바람도 붑니다. 각 노선별 버스가 어디쯤을 이동 중인지, 정류장 근처의 동네에서는 어떤 행사를 계획 중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전화기는 무료로 충전할 수 있고, 여름엔 차고 겨울엔 뜨끈한 벤치에 앉아 쉴 수도 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불현듯 걱정이 생깁니다.
조금은 덜 친절하고 덜 똑똑한 공공시설물이라면 어땠을까요? 버스정류장에 우리 궁궐이나 한옥에서 볼 수 있는 ‘들어열개창’처럼 창호를 설계해 시원한 바람을 들이거나 쉘터의 차양을 한옥의 처마처럼 길게 두어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은 가리도록 권장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죠. 폭염의 한가운데에 머물렀던 스마트 쉘터 속에서 또다시 이면을 떠올렸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곡 가운데 ‘사랑의 이면(The other side of love)’이라는 음악이 있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만든 곡을 그의 딸 사카모토 미우가 노래로 불렀는데, 사랑의 이면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면에 대해 떠오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음악입니다. 하루는 6학년이 된 큰아이에게 음악에 관해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고 “넌 이 음악 어때?”하고 묻자 “꼭 ‘절망 속에도 희망은 있다’고 말하는 것 같네”라 답했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이면에는 아이들의 해석처럼 심란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망의 이면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In my heart, I know I must be right 나는 마음속으로 (스스로가) 틀림없이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Darkest shadows will someday come to light 어두운 그림자조차 언젠가는 빛을 품을 것입니다 I've been down, but I can rise above 나는 그동안 침울해 있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I keep searching for the other side of love 사랑의 이면을 계속 찾고 있습니다
- 사카모토 류이치 곡, 사카모토 미우 노래 <사랑의 이면(The other side of love)>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