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함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30년 만에 4K로 부활한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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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희생>
1995년 한국에서 개봉
30년 만에 4K 리마스터링 재개봉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누구인가.
타르콥스키의 미학으로 뜯어보는
그의 마지막 영화 <희생>
도스토옙스키, 푸시킨의 영향을 받은 감독
참혹함 앞에서 예술이 말할 수 있는 것을 고민
실존적 고민에 빠져있는 영화 속 인물들
죽은 나뭇가지에 잎을 피우는 유일한 일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이
가망 없음 너머를 희망하는 최후의 능력
1995년 한국에서 개봉
30년 만에 4K 리마스터링 재개봉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누구인가.
타르콥스키의 미학으로 뜯어보는
그의 마지막 영화 <희생>
도스토옙스키, 푸시킨의 영향을 받은 감독
참혹함 앞에서 예술이 말할 수 있는 것을 고민
실존적 고민에 빠져있는 영화 속 인물들
죽은 나뭇가지에 잎을 피우는 유일한 일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이
가망 없음 너머를 희망하는 최후의 능력
포착한 시간을 조각하는 작업으로 영화를 이해한 타르콥스키는 자신의 미학을 다룬 책 제목을 <봉인된 시간>이라 명명했다. 그가 남긴 일기를 엮은 책의 제목은 <타르콥스키의 순교일기>다. 이쯤 되면 타르콥스키의 장편영화 일곱 편은 모두 ‘정신적인 것’이 아닐 수 없겠다.
1995년 동숭시네마테크에서 <희생>을 보았다. 전 세계에서 다시 없을 기록적인 숫자로, 그러니까 예술 영화라고 일컬어지는 영화치고 이례적으로 많은 관객이 들었다고 하지만, 90년대엔 사실 파졸리니, 안토니오니, 앙겔로풀로스, 키에슬롭스키, 쿠스트리차, 키아로스타미 등을 극장에서 보는 게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다.
▶(관련 기사) “이 영화는 돈 내고 봐야지”…4K로 되살아난 ‘선명한 클래식’
“우리 인간들 모두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특별히 인간적인 것, 영원한 것에 관하여 관객들이 숙고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나의 의미라고 생각한다”던 타르콥스키의 목소리가 꿈속으로 찾아온 듯, <희생>이 30년 만에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다시 극장에 걸린다는 소식을 듣고 타르콥스키의 영화들을 제작 순으로 다시 보았다.
러시아 국립 영화학교 졸업작품 <롤러와 바이올린>은 DVD나 파일 형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 모스필름 유튜브 계정에 들어가 보았는데, 맨 위 댓글로 올라온 글이 기억에 남았다. “저는 2022년 2월 24일 이후에도 타르콥스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인사드립니다. 이제 형제 살인을 끝낼 때입니다. 모스필름에 감사를 전하며.” 말과 행동, 그리고 침묵
<희생> 개봉 당시인 1986년, 세계는 핵무기로 무장한 두 정치 체제가 수십 년에 걸쳐 빚은 대립으로 축적된 피로, 긴장과 두려움이 편만했다. 영화는 재앙으로부터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 가운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시각적, 의미론적 구성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표현된 주요 아이디어는 매우 명확하고 구체적이다. 세상 종말의 문턱에 선 사람이 주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희생한다는 얘기. 그런데 상황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타르콥스키의 전작 두 편(<잠입자>와 <향수>)에 스며들어 있는 묵시록적 예감은 그의 마지막 작품 <희생>에서 은유인 동시에 매우 현실적인 핵전쟁의 형태로 구체화한다. 이는 주로 소리로 전달된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보도, 폭격기의 굉음,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 전화벨 소리 등. 주인공 알렉산더는 실존적 절망과 열패감에 빠져 길을 잃은 지식인이다.
그는 이기심과 폭력 위에 세워진 문명의 위험한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말한다’. 그리면서 ‘말만’ 하는 자신을 혐오한다. 아내 애들레이드는 영화 속 다른 어떤 캐릭터보다 알렉산더로부터 (또 아들 고센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녀는 개인의 문제에 집착하고 물질주의적 사고에 이끌려 재앙 앞에서 자기중심적인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인간의 화신이다. 알렉산더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세상을 멸망에서 건져주신다면 감수하겠노라는 희생은 어떤 것인가. 사랑하는 집과 아들을 포기하는 것, 영영 말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는 곧 주인, 아버지, 창작자의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그 희생은 사실 이전부터도 천천히 준비되어 온 것이긴 하다. 외딴곳에 들어앉았고 진실한 글쓰기를 위해 가식적인 연기 작업에서 멀어졌다. ‘말뿐이었던 시절’에도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서 참되고 아름다운 인간, 그러나 결국 실패하는 인물인 미슈킨 공작을 연기했다.
타르콥스키가 브레송과 함께 가장 높이 평가했던 감독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페르소나>(1966)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페르소나>에서 배우인 엘리자베스는 어린 아들을 버리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공연 도중 무대에서 갑자기 침묵에 빠진다. <희생>에서 알렉산더는 아버지에게 업히려는 아들을 반사적으로 밀쳐내고 구급차에 실려가며 침묵을 이행한다. 무의식, 이중 자아/본질과 이상, 모성애/부성애, 예술론 등을 다룬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많이 닮아있다.
타르콥스키가 골몰한 것들의 기원
그는 첫 장편영화부터 소련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로 주목받았다. <이반의 어린 시절>이 1962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것. 그때까지 소련 영화들은 흔히 몽타주 기법의 대표자 에이젠슈테인의 후예들로 가득했다. 그는 몽타주 기법이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기에게로 연관시키는 가능성을 앗아가 버린다며 존재의 뿌리로서의 고향집, 어린 시절, 조국, 대지에 대한 의식의 연결고리라는 자신의 주제들이 러시아의 -특히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문화 전통을 물려받고 있음을 밝혔다.
더불어 20세기 소련에서 이러한 전통이 경시되는 이유는 그것이 이른바 ‘정신적 위기’를 드러내므로 원칙적으로 유물론과 통합될 수 없기 때문이며, 자신에게 정신적 위기란 부조화에 빠진 삶 가운데 조화를 갈망하는 인간 영혼이 보일 수 있는 건강함일 뿐이라고도 했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사명은 19세기 러시아 시인 푸시킨으로부터 물려받았다. 푸시킨은 <예언자>라는 시에서 “영혼의 갈망에 지쳐” 사막에서 굶주리다가 만난 천사가 시인의 입을 벌려 목 깊숙한 곳에서 “죄 많고 방탕하고 사악한 혀를 뽑았”다고, 그리고는 그의 피투성이 손으로 다시 “현명한 뱀의 창을 박았”다고 말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가슴을 갈라 “팔딱이는 심장도 앗아가” 버리고 거기다 “불타는 석탄 덩어리를 밀어넣었”다고 노래한다. 타르콥스키는 자신에게도 그렇게 신의 손길이 임했다고 지각했다.
타르콥스키는 예술이 사회와 만나는 방식을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통해 일찌감치 보여주었다. 타타르인의 침략으로 러시아인들이 고통당하는 현실에서 담장에 갇힌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이며, 예술은 이 참혹함 앞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회의에 찬 성상화가 루블료프는 수도원에서 깨달았다고 여긴 ‘사랑, 조화, 박애’라는 삶의 지표도 폐기한 채 침묵에 들어간다.
그러나 민중의 절실한 희망을 담고 있는 보다 높은 진실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서 그는 다시 ‘사랑, 조화, 박애’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타르콥스키는 교회의 품에서 이콘을 낚아채 우리에게 자유와 욕망에 대해 질문해 나가라는 모험을 제안했다.
타르콥스키의 주인공들은 모두 실존적 고민에 빠져있다. 이는 인간의 본질이 자유에 있다고 하면서도 더욱 무자비하게 인간 정신의 무질서와 그 어두운 움직임을 드러내며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렸던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이다. 고대 러시아로부터 내려오는 ‘유로지비(바보 성자)’의 전통은 <안드레이 루블료프>에도 흐른다. 이들은 순례자의 모습과 누더기를 걸친 거지의 모습을 한 외모를 통해 질서 잡힌 사회관계 속에서 사는 보통 사람들의 눈길을 모든 이성적, 합리적 법칙성 너머에 있는, 예언과 희생과 기적에 가득 찬 또 다른 세계로 돌려주었던 자들이다. 예술과 구원
타르콥스키가 말하는 ‘형상’은 무엇인가. 그는 20세기 초 러시아의 상징주의 이론가 뱌체슬라브 이바노프의 개념을 빌어 “우리가 꿰뚫어 보지 못할지라도 직시하고자 하는 진실에 대한 우리의 인상”이라 했다. 이는 매우 평범한 현상 속에서도 삶의 진실을 표현하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어 무한한 것과 관계 맺게 하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희생>은 알렉산더가 걸어두고 고민하는 다빈치의 그림으로 시작되고 우편배달부 빅터의 생일 선물인 이콘 화집의 페이지가 하나둘 넘겨진다.
타르콥스키는 창작의 자유를 찾아 서방 세계로 떠났으나 물질적 사고를 부추기는 분위기 속에 삶이 점점 무의미하고 협소하게 느껴져 정신적 위기를 겪는 (혹은 겪는 줄도 모르는) 병자들이 널린 것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세상은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고 그 절망 앞에서 타르콥스키는 구원의 담지체로서 그의 영화들에서 내내 등장했던 집(<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우물가의 어머니가 있는 집, <솔라리스>의 아버지가 사는 집, <거울>의 유년기의 집, <향수>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을 불사른다.
그에겐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집은 돌아갈 곳으로서의 가치를 지켜내지 못했으므로, 참된 삶의 영위를 불가능하게 하는 장벽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므로 불타버리고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다. 집이 불타오르고 알렉산더가 야생 닭처럼 뛰어다니는 <희생> 마지막 시퀀스의 그 유명한 6분 52초짜리 롱테이크가 보여주는 것은 극한의 고통으로 착란에 빠진, 어찌할 바 모르는 인간이다. 영화적 차원-현실과 꿈과 꿈속의 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가. 사실 이를 구체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타르콥스키를 무척 불쾌하게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연출의 힘을 빌려 필요한 감정을 강제로 얻어내는 것을 극히 혐오했다. 그러나 색채 분화로부터 우리는 <희생>의 정서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천연 톤, 흑백 톤, 세피아 톤이 그것인데 실제적인 것,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을 표시한다고 가정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알렉산더의 종말론적 환상은 흑백으로, 안쪽 이야기 중 다시 안쪽 이야기가 되는 부분은 세피아 톤으로 처리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인류를 이끄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알렉산더의 시야에서 고센이 사라진다. 이 장면에서 알렉산더는 어린 아들을 가르치고 고매한 정신 안에서 그에게 길을 열어 보이기를 열망하나 아버지와 아들은 살아있는 감정적 연결 속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잃어버린 인간성에 대한 추상적인 독백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어딘지 멀어져 있다.
고센을 상처입히고 쓰러진 알렉산더가 두려움 속에 떨고만 있을 때 흑백이었다가, 그가 불안과 공포에서 더 나아가-아들에 대한 애정과 절절함과는 별개로-아들과의 유대감은 실상 부실하고 자신이 아이에게 오히려 해가 된다는 자각과 죄책감, 아이에게 물려줄 정신적 유산이 없음을 통감하며 ‘행동’의 영역으로, 즉 마리아에게로 이동하게 되자 화면은 세피아 톤으로 변한다. 그러니까 가장 신비롭게 여겨지는 화면들, 즉 유리창을 통해 다빈치의 그림이 비치고 오토가 제안하고, 알렉산더가 마리아에게 가는 길은 모두 이 상징적인 차원에 속한다. 무엇을 행할 것인가
어디로부터인가 홀연히 나타난 우편배달부 오토는 알렉산더의 도덕적 선택을 이끄는 안내자다. 그가 알렉산더에게 건네는 선물은 17세기 유럽의 지도(이것을 놓고도 아내 애들레이드는 진품이냐 가품이냐 따위를 논한다)이고 이는 알렉산더에게 “잃어버린 세계”를 환기한다.
오토는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으나 진실한 일들의 수집가”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그림이 소개될 때 “끔찍하게 무서운 그림”이라고도 한다. 대신 그는 “프란체스카의 그림이 좋다”고 말한다.
이 그림은 아레초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있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 연작인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만남과 성목 경배, 성 십자가의 전설>이다.
솔로몬을 방문하러 오던 시바 여왕이 강을 건너려다 나무 들보를 발견하는데, 그것이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에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며 훗날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쓰일 십자가라는 큰 울림을 듣고 그 앞에 무릎 꿇어 경배했다는 것이 이 프레스코화의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될 ‘거룩한 나무’를 정성으로 키우며 다가올 ‘그날’을 예비한다는 전설. 오토는 알렉산더에게 신비한 능력을 지닌 마리아에게 가서 그녀와 함께 누워 세상을 구하라고 조언하여 현실의 관점에서 불합리하나 구체적인 일임에는 분명한 ‘행동’ 기회를 그에게 제공한다.
마리아는 알렉산더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데, 분명한 계급적 차이를 보일뿐더러 비굴해 보일 정도로 겸손하지만 어딘지 늘 겁먹은 얼굴이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들로 말수도 적다. 알렉산더는 고민 끝에 마리아에게 가서 “내 존재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다”라며 제발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자신을 구해달라고 말한다.
다시 폭격기의 굉음이 이어지고 잠시 실랑이 끝에 알렉산더와 마리아는 포옹으로 합쳐져 공중 부양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원죄 없는 잉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난 알렉산더는 어머니를 부른다. 알렉산더와 마리아의 결합이 죽은 아들의 몸을 끌어안고 슬픔에 잠긴 마리아의 형상인 피에타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하녀 마리아의 형상에는 이교도 시바 여왕의 지혜와 아이슬란드 출신 마녀의 천진함과 성모의 순명이 혼재되어 있다. 나무에서 나무에로
영화에 인물이나 풍경이 비치기 직전, 마치 오페라 무대의 커튼에 수놓은 무늬처럼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의 일부가 화면을 채운다. 무릎을 꿇은 노인이 아기의 손을 향해 내민 금잔에는 몰약이 담겨있다. 십자가에 달릴 예수의 운명을 암시함으로써 알렉산더의 희생 또한 암시된다.
그런데 크레딧이 끝나갈 때 카메라는 천천히 그림의 상부로 이동해 아기 예수도 아니고 성모 마리아도 아니라 무성하게 잎을 드리운 나무를 보여주며 멈춘다. 그림이 거두어지고 아버지 알렉산더와 아들 고센이 마른 나뭇가지를 땅에 심는다. 그리고 아들에게 들려주는 알렉산더의 이야기는 이집트 스케테 금욕주의자였던 성 요한 콜로프와 그의 ‘순종의 나무’ 전설이다. 겉보기에 헛되나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물을 주는 노력으로 마른 나뭇가지에서 세 번째 해에 드디어 녹음이 우거지고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 전쟁 같은 소동 이후 마지막 장면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이 혼미해진 아버지를 ‘슬픔의 집’으로 데려가는 구급차가 지나가는 가운데 어제 아버지와 심은 나무에 약속대로 물을 주고 (나무에 물을 주라’, 이것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유일한 계명이 된다) 그 아래 누운 어린 소년은 이제 무엇을 바랄 수 있나.
아버지의 침묵으로 아들은 입을 여는데, 그 처음 말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무슨 뜻이죠, 아빠?”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시작점부터 그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고센’은 이스라엘 민족이 대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올라가 사백 년간 머물렀던 지역명이기도 하다. 그곳은 엑소더스의 시작점이기도 한 것이다. 카메라는 ‘위’를 향하고, 나뭇가지에서 기적처럼 옅은 싹이 돋는다. 그는 <희생>을 만든 후 차기작으로 <햄릿>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1986년 12월 29일 파리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간이 지닌 것 중 가장 마지막까지 붙잡을 만한 유일한 것을 타르콥스키는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보았다. 149분의 러닝타임을 견디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가망 없음 너머를 희망하는 최후의 능력일 것이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
1995년 동숭시네마테크에서 <희생>을 보았다. 전 세계에서 다시 없을 기록적인 숫자로, 그러니까 예술 영화라고 일컬어지는 영화치고 이례적으로 많은 관객이 들었다고 하지만, 90년대엔 사실 파졸리니, 안토니오니, 앙겔로풀로스, 키에슬롭스키, 쿠스트리차, 키아로스타미 등을 극장에서 보는 게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다.
▶(관련 기사) “이 영화는 돈 내고 봐야지”…4K로 되살아난 ‘선명한 클래식’
“우리 인간들 모두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특별히 인간적인 것, 영원한 것에 관하여 관객들이 숙고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나의 의미라고 생각한다”던 타르콥스키의 목소리가 꿈속으로 찾아온 듯, <희생>이 30년 만에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다시 극장에 걸린다는 소식을 듣고 타르콥스키의 영화들을 제작 순으로 다시 보았다.
러시아 국립 영화학교 졸업작품 <롤러와 바이올린>은 DVD나 파일 형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 모스필름 유튜브 계정에 들어가 보았는데, 맨 위 댓글로 올라온 글이 기억에 남았다. “저는 2022년 2월 24일 이후에도 타르콥스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인사드립니다. 이제 형제 살인을 끝낼 때입니다. 모스필름에 감사를 전하며.” 말과 행동, 그리고 침묵
<희생> 개봉 당시인 1986년, 세계는 핵무기로 무장한 두 정치 체제가 수십 년에 걸쳐 빚은 대립으로 축적된 피로, 긴장과 두려움이 편만했다. 영화는 재앙으로부터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 가운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시각적, 의미론적 구성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표현된 주요 아이디어는 매우 명확하고 구체적이다. 세상 종말의 문턱에 선 사람이 주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희생한다는 얘기. 그런데 상황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타르콥스키의 전작 두 편(<잠입자>와 <향수>)에 스며들어 있는 묵시록적 예감은 그의 마지막 작품 <희생>에서 은유인 동시에 매우 현실적인 핵전쟁의 형태로 구체화한다. 이는 주로 소리로 전달된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보도, 폭격기의 굉음,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 전화벨 소리 등. 주인공 알렉산더는 실존적 절망과 열패감에 빠져 길을 잃은 지식인이다.
그는 이기심과 폭력 위에 세워진 문명의 위험한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말한다’. 그리면서 ‘말만’ 하는 자신을 혐오한다. 아내 애들레이드는 영화 속 다른 어떤 캐릭터보다 알렉산더로부터 (또 아들 고센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녀는 개인의 문제에 집착하고 물질주의적 사고에 이끌려 재앙 앞에서 자기중심적인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인간의 화신이다. 알렉산더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세상을 멸망에서 건져주신다면 감수하겠노라는 희생은 어떤 것인가. 사랑하는 집과 아들을 포기하는 것, 영영 말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는 곧 주인, 아버지, 창작자의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그 희생은 사실 이전부터도 천천히 준비되어 온 것이긴 하다. 외딴곳에 들어앉았고 진실한 글쓰기를 위해 가식적인 연기 작업에서 멀어졌다. ‘말뿐이었던 시절’에도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서 참되고 아름다운 인간, 그러나 결국 실패하는 인물인 미슈킨 공작을 연기했다.
타르콥스키가 브레송과 함께 가장 높이 평가했던 감독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페르소나>(1966)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페르소나>에서 배우인 엘리자베스는 어린 아들을 버리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공연 도중 무대에서 갑자기 침묵에 빠진다. <희생>에서 알렉산더는 아버지에게 업히려는 아들을 반사적으로 밀쳐내고 구급차에 실려가며 침묵을 이행한다. 무의식, 이중 자아/본질과 이상, 모성애/부성애, 예술론 등을 다룬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많이 닮아있다.
타르콥스키가 골몰한 것들의 기원
그는 첫 장편영화부터 소련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로 주목받았다. <이반의 어린 시절>이 1962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것. 그때까지 소련 영화들은 흔히 몽타주 기법의 대표자 에이젠슈테인의 후예들로 가득했다. 그는 몽타주 기법이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기에게로 연관시키는 가능성을 앗아가 버린다며 존재의 뿌리로서의 고향집, 어린 시절, 조국, 대지에 대한 의식의 연결고리라는 자신의 주제들이 러시아의 -특히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문화 전통을 물려받고 있음을 밝혔다.
더불어 20세기 소련에서 이러한 전통이 경시되는 이유는 그것이 이른바 ‘정신적 위기’를 드러내므로 원칙적으로 유물론과 통합될 수 없기 때문이며, 자신에게 정신적 위기란 부조화에 빠진 삶 가운데 조화를 갈망하는 인간 영혼이 보일 수 있는 건강함일 뿐이라고도 했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사명은 19세기 러시아 시인 푸시킨으로부터 물려받았다. 푸시킨은 <예언자>라는 시에서 “영혼의 갈망에 지쳐” 사막에서 굶주리다가 만난 천사가 시인의 입을 벌려 목 깊숙한 곳에서 “죄 많고 방탕하고 사악한 혀를 뽑았”다고, 그리고는 그의 피투성이 손으로 다시 “현명한 뱀의 창을 박았”다고 말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가슴을 갈라 “팔딱이는 심장도 앗아가” 버리고 거기다 “불타는 석탄 덩어리를 밀어넣었”다고 노래한다. 타르콥스키는 자신에게도 그렇게 신의 손길이 임했다고 지각했다.
타르콥스키는 예술이 사회와 만나는 방식을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통해 일찌감치 보여주었다. 타타르인의 침략으로 러시아인들이 고통당하는 현실에서 담장에 갇힌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이며, 예술은 이 참혹함 앞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회의에 찬 성상화가 루블료프는 수도원에서 깨달았다고 여긴 ‘사랑, 조화, 박애’라는 삶의 지표도 폐기한 채 침묵에 들어간다.
그러나 민중의 절실한 희망을 담고 있는 보다 높은 진실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서 그는 다시 ‘사랑, 조화, 박애’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타르콥스키는 교회의 품에서 이콘을 낚아채 우리에게 자유와 욕망에 대해 질문해 나가라는 모험을 제안했다.
타르콥스키의 주인공들은 모두 실존적 고민에 빠져있다. 이는 인간의 본질이 자유에 있다고 하면서도 더욱 무자비하게 인간 정신의 무질서와 그 어두운 움직임을 드러내며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렸던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이다. 고대 러시아로부터 내려오는 ‘유로지비(바보 성자)’의 전통은 <안드레이 루블료프>에도 흐른다. 이들은 순례자의 모습과 누더기를 걸친 거지의 모습을 한 외모를 통해 질서 잡힌 사회관계 속에서 사는 보통 사람들의 눈길을 모든 이성적, 합리적 법칙성 너머에 있는, 예언과 희생과 기적에 가득 찬 또 다른 세계로 돌려주었던 자들이다. 예술과 구원
타르콥스키가 말하는 ‘형상’은 무엇인가. 그는 20세기 초 러시아의 상징주의 이론가 뱌체슬라브 이바노프의 개념을 빌어 “우리가 꿰뚫어 보지 못할지라도 직시하고자 하는 진실에 대한 우리의 인상”이라 했다. 이는 매우 평범한 현상 속에서도 삶의 진실을 표현하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어 무한한 것과 관계 맺게 하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희생>은 알렉산더가 걸어두고 고민하는 다빈치의 그림으로 시작되고 우편배달부 빅터의 생일 선물인 이콘 화집의 페이지가 하나둘 넘겨진다.
타르콥스키는 창작의 자유를 찾아 서방 세계로 떠났으나 물질적 사고를 부추기는 분위기 속에 삶이 점점 무의미하고 협소하게 느껴져 정신적 위기를 겪는 (혹은 겪는 줄도 모르는) 병자들이 널린 것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세상은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고 그 절망 앞에서 타르콥스키는 구원의 담지체로서 그의 영화들에서 내내 등장했던 집(<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우물가의 어머니가 있는 집, <솔라리스>의 아버지가 사는 집, <거울>의 유년기의 집, <향수>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을 불사른다.
그에겐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집은 돌아갈 곳으로서의 가치를 지켜내지 못했으므로, 참된 삶의 영위를 불가능하게 하는 장벽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므로 불타버리고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다. 집이 불타오르고 알렉산더가 야생 닭처럼 뛰어다니는 <희생> 마지막 시퀀스의 그 유명한 6분 52초짜리 롱테이크가 보여주는 것은 극한의 고통으로 착란에 빠진, 어찌할 바 모르는 인간이다. 영화적 차원-현실과 꿈과 꿈속의 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가. 사실 이를 구체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타르콥스키를 무척 불쾌하게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연출의 힘을 빌려 필요한 감정을 강제로 얻어내는 것을 극히 혐오했다. 그러나 색채 분화로부터 우리는 <희생>의 정서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천연 톤, 흑백 톤, 세피아 톤이 그것인데 실제적인 것,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을 표시한다고 가정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알렉산더의 종말론적 환상은 흑백으로, 안쪽 이야기 중 다시 안쪽 이야기가 되는 부분은 세피아 톤으로 처리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인류를 이끄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알렉산더의 시야에서 고센이 사라진다. 이 장면에서 알렉산더는 어린 아들을 가르치고 고매한 정신 안에서 그에게 길을 열어 보이기를 열망하나 아버지와 아들은 살아있는 감정적 연결 속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잃어버린 인간성에 대한 추상적인 독백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어딘지 멀어져 있다.
고센을 상처입히고 쓰러진 알렉산더가 두려움 속에 떨고만 있을 때 흑백이었다가, 그가 불안과 공포에서 더 나아가-아들에 대한 애정과 절절함과는 별개로-아들과의 유대감은 실상 부실하고 자신이 아이에게 오히려 해가 된다는 자각과 죄책감, 아이에게 물려줄 정신적 유산이 없음을 통감하며 ‘행동’의 영역으로, 즉 마리아에게로 이동하게 되자 화면은 세피아 톤으로 변한다. 그러니까 가장 신비롭게 여겨지는 화면들, 즉 유리창을 통해 다빈치의 그림이 비치고 오토가 제안하고, 알렉산더가 마리아에게 가는 길은 모두 이 상징적인 차원에 속한다. 무엇을 행할 것인가
어디로부터인가 홀연히 나타난 우편배달부 오토는 알렉산더의 도덕적 선택을 이끄는 안내자다. 그가 알렉산더에게 건네는 선물은 17세기 유럽의 지도(이것을 놓고도 아내 애들레이드는 진품이냐 가품이냐 따위를 논한다)이고 이는 알렉산더에게 “잃어버린 세계”를 환기한다.
오토는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으나 진실한 일들의 수집가”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그림이 소개될 때 “끔찍하게 무서운 그림”이라고도 한다. 대신 그는 “프란체스카의 그림이 좋다”고 말한다.
이 그림은 아레초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있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 연작인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만남과 성목 경배, 성 십자가의 전설>이다.
솔로몬을 방문하러 오던 시바 여왕이 강을 건너려다 나무 들보를 발견하는데, 그것이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에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며 훗날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쓰일 십자가라는 큰 울림을 듣고 그 앞에 무릎 꿇어 경배했다는 것이 이 프레스코화의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될 ‘거룩한 나무’를 정성으로 키우며 다가올 ‘그날’을 예비한다는 전설. 오토는 알렉산더에게 신비한 능력을 지닌 마리아에게 가서 그녀와 함께 누워 세상을 구하라고 조언하여 현실의 관점에서 불합리하나 구체적인 일임에는 분명한 ‘행동’ 기회를 그에게 제공한다.
마리아는 알렉산더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데, 분명한 계급적 차이를 보일뿐더러 비굴해 보일 정도로 겸손하지만 어딘지 늘 겁먹은 얼굴이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들로 말수도 적다. 알렉산더는 고민 끝에 마리아에게 가서 “내 존재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다”라며 제발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자신을 구해달라고 말한다.
다시 폭격기의 굉음이 이어지고 잠시 실랑이 끝에 알렉산더와 마리아는 포옹으로 합쳐져 공중 부양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원죄 없는 잉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난 알렉산더는 어머니를 부른다. 알렉산더와 마리아의 결합이 죽은 아들의 몸을 끌어안고 슬픔에 잠긴 마리아의 형상인 피에타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하녀 마리아의 형상에는 이교도 시바 여왕의 지혜와 아이슬란드 출신 마녀의 천진함과 성모의 순명이 혼재되어 있다. 나무에서 나무에로
영화에 인물이나 풍경이 비치기 직전, 마치 오페라 무대의 커튼에 수놓은 무늬처럼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의 일부가 화면을 채운다. 무릎을 꿇은 노인이 아기의 손을 향해 내민 금잔에는 몰약이 담겨있다. 십자가에 달릴 예수의 운명을 암시함으로써 알렉산더의 희생 또한 암시된다.
그런데 크레딧이 끝나갈 때 카메라는 천천히 그림의 상부로 이동해 아기 예수도 아니고 성모 마리아도 아니라 무성하게 잎을 드리운 나무를 보여주며 멈춘다. 그림이 거두어지고 아버지 알렉산더와 아들 고센이 마른 나뭇가지를 땅에 심는다. 그리고 아들에게 들려주는 알렉산더의 이야기는 이집트 스케테 금욕주의자였던 성 요한 콜로프와 그의 ‘순종의 나무’ 전설이다. 겉보기에 헛되나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물을 주는 노력으로 마른 나뭇가지에서 세 번째 해에 드디어 녹음이 우거지고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 전쟁 같은 소동 이후 마지막 장면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이 혼미해진 아버지를 ‘슬픔의 집’으로 데려가는 구급차가 지나가는 가운데 어제 아버지와 심은 나무에 약속대로 물을 주고 (나무에 물을 주라’, 이것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유일한 계명이 된다) 그 아래 누운 어린 소년은 이제 무엇을 바랄 수 있나.
아버지의 침묵으로 아들은 입을 여는데, 그 처음 말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무슨 뜻이죠, 아빠?”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시작점부터 그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고센’은 이스라엘 민족이 대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올라가 사백 년간 머물렀던 지역명이기도 하다. 그곳은 엑소더스의 시작점이기도 한 것이다. 카메라는 ‘위’를 향하고, 나뭇가지에서 기적처럼 옅은 싹이 돋는다. 그는 <희생>을 만든 후 차기작으로 <햄릿>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1986년 12월 29일 파리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간이 지닌 것 중 가장 마지막까지 붙잡을 만한 유일한 것을 타르콥스키는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보았다. 149분의 러닝타임을 견디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가망 없음 너머를 희망하는 최후의 능력일 것이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