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사태가 일상인 자들이 외친다 "내가 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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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동윤의 아트하우스 칼럼
영화 <이오 카피타노> 리뷰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 수상
제96회 아카데미 국제장편, 제81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부문 노미네이트
영화 <이오 카피타노> 리뷰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 수상
제96회 아카데미 국제장편, 제81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부문 노미네이트
세네갈 소년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누군가에게 이 문장은 지극히 단순한 로그라인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여행이 평범한 일상의 한 부분이 된 이들에게 세네갈과 이탈리아는 비행기로 몇 시간 걸리면 가 닿을, 가까운 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마테오 가로네 감독은 이 문장을 붙잡고 8년을 고뇌했다. 그는 세네갈 소년이 이탈리아로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고 떠나야만 하는 여정임을 수많은 필드워크와 인터뷰, 자료조사를 통해 이해하고 있었다. ‘A.FRAME’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전 작품들은 자신이 선택했지만 이번 작품은 이야기가 자신을 선택했다고 고백한 것처럼 감독에게 <이오 카피타노>는 운명처럼 반드시 완성해야만 하는 영화였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작품을 완성해야만 하는 책임감으로 다가왔을까? 그 책임감은 과연 영화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재현되었을까? 이 질문들의 답을 찾는 여정은 세네갈이 어디에 위치하는지조차 무지한 대중들에게 영화 속 비극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이 될 것이다.
세이두와 무사의 목숨 건 여정
세이두(세이두 사르)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16세 소년이다. 그에겐 꿈이 하나 있는데 바로 유명한 가수가 되는 것이다. 일상에서 발견한 언어들로 곡을 만들어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이 그의 꿈이지만 세네갈에선 이 꿈을 이룰 수 없다. 고작 자신이 만든 곡을 동네 청년들과 함께 흥겹게 부르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결국 세이두는 사촌 무사(무스타파 폴)와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어렵게 돈을 모으고 여행을 반대하는 어머니 몰래 드디어 여정에 오르지만 그 여정은 곧 생사를 오가는 지옥 길이 되어 버린다. 세이두와 무사가 세네갈을 떠나기 직전, 그들은 두 번의 경고를 받는다. 첫 번째 경고는 세이두의 어머니. 세네갈을 떠난 자들은 모두 사막과 바다에서 죽어갔다며 그의 선택을 막아선다. 두 번째는 여행 브로커 시스코. 그는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는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참혹한 실상을 폭로한다. 국경을 넘는 것의 위험성과 이민자의 참상을 경고한 두 사람의 메시지는 세이두와 무사의 욕망을 잠재우지 못한다. <이오 카피타노>는 그 원인을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세네갈의 삶은 그들에게 이주가 필연적 조건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고 즐거울 뿐이다.
낯설지만 익숙한 이주자의 욕망
세이두와 무사의 성공에 대한 욕망은 <이오 카피타노>가 다른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작품 속 인물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예를 들어 켄 로치 감독의 <빵과 장미>(2002)는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야 하는 마야(필라르 파딜라)에게 그 어떤 다른 대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직 그녀에게는 먼저 건너간 언니처럼 반드시 국경을 넘어 멕시코의 가족들을 부양해야만 하는 의무만 주어진다. 자본의 전지구화 속에서 대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이 여전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자리가 있는 나라로 이주를 감행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고도로 팽창한 자본 체제에서 타인에 대한 욕망은 타국에 대한 욕망으로 확장되며 이전과는 다른 목적의 이주를 감행하는 현실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잘 사는 국가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이 셀럽이 많은 국가에 가면 더 유명해질 수 있을 거라는 환상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국경을 넘는 과정은 외면했던 위협을 마주하고 자신들이 품었던 욕망이 한낱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국경을 넘는 영화들은 그 국경을 분명한 선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도상으로 분명하게 표시된 국경이 실제로는 광활한 대지의 일부분일 뿐임을 묘사하며 국경의 허상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노 베어스>(2023)에서는 튀르키예로 건너가지 못한 채 이란에 감금당한 파나히 감독이 원격으로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묘사된다. 국경을 쉽게 넘을 수 있는 조감독이 감독을 찾아와 국경을 함께 넘자 제안하는 장면에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짙은 어둠으로 국경지대를 담아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로지 보이는 것은 먼발치에 밝게 빛나는 튀르키예의 국경 도시 불빛뿐이었다. 어디가 경계인지, 자신이 지금 경계를 넘었는지 아닌지조차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독에게 국경은 상징적 기호일 뿐이었다.
온몸으로 체험하는 투명한 국경선
하지만 <이오 카피타노>는 이전의 영화들처럼 국경을 추상화시키지 않는다. 분명 지도에서처럼 명징한 선으로 대지에 표시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국경을 넘는 것은 명백한 선을 넘는 것임을 자명하게 그려낸다. 세이두와 무사가 세네갈을 벗어나 말리를 거쳐 리비아로 향하는 과정은 그 나름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먼저 세네갈에서 말리로 입국하기 위해서 그들은 불법 여권을 만들어 국경 수비대를 통과한다. (불법 여권은 곧바로 들통나 뇌물을 줘야만 했다) 이후 말리에서 리비아로 가기 위해 브로커를 통해 트럭에 오른 두 사람은 사하라 사막을 한 참 달리다 야자수가 심어진 곳에서 기다리던 가이드 앞에 무작정 버려진다. 이후 가이드를 따라 도보로 사막을 이동한 두 사람은 리비아의 갱단에 붙잡혀 감금당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이오 카피타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국경이 어떤 식으로 실존하고 있는지 몸으로 체감하도록 만든다. 국가가 ‘자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주 이산자(디아스포라)들을 배척하고 외면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 상징으로서의 국경은 분명 재의미화해야 하는 기호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선을 목숨 걸고 건너야만 하는 자들에게 국경은 투명한 태산과 같다. 온몸으로 넘어야만 하는 경계이지만 절대 그 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기루인 셈이다. 마테오 가로네 감독은 세이두 캐릭터가 필드워크 과정에서 만난 세네갈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만들어졌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그 소년은 세이두처럼 실제로 배를 직접 몰아 이탈리아에 도착했고 인신매매 혐의로 감옥에 투옥된 상태였다고 한다. 비록 이탈리아 법은 그를 범죄자로 대하고 있었지만 배에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이주자들은 그 소년을 영웅으로 대하고 있었다.
마테오 감독이 그 소년과 이주자들을 통해서 발견한 것은 이주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의 처참한 환경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주의 과정에서 한 명의 생명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절박한 책임감이었다. 대부분의 불법 이주는 철저히 인간을 돈으로 치환하여 마치 사물처럼 대한다. 사하라 사막을 달리다 트럭에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도 차는 멈추지 않는다. 가이드는 사람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걸을 뿐이고 여기서 낙오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사막의 모래 속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질 뿐이다. 세이두가 이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결국 존엄성을 획득할 수 없는 현실의 참혹함이었던 것이다. <이오 카피타노>는 다른 디아스포라 영화들처럼 쉽게 이주노동자들을 연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연민할 감정이 남아 있다면 차라리 세이두처럼 행동하라고 촉구한다. 분명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문제의 근원이 파악되고 본질적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 시간에도 발생하고 있는 이주자들의 죽음은 거시적 관점으로 조망할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라면 세이두처럼 뭐라도 해야만 한다. 이론으로, 학문으로, 철학으로 이들의 희생을 절대 종식시킬 수 없다. 비상사태가 일상인 자들에게 여유는 사치일 뿐이다. <이오 카피타노>의 외침을 의미심장하게 귀담아들어야 하는 이유다. 이동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