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예술 중 어느 쪽이 더 큰 위로를 줄까

이름난 한 명리 전문가는 결국 인간이 위로를 받을 대상은 자연뿐이라고 말했다. 틈나는 대로 대공원 숲길을 거쳐 퇴근하고, 나름 이른 나이(?)부터 각종 자락길과 둘레길에서 나 홀로 산책을 다닌 사람으로서 공감이 된다. 인간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그중 누군가의 감정이 요동칠지 모르게 때때로 어리석다. 하지만 나무, 꽃, 새는 조용히 아름답기만 하다. 적어도 인간의 눈에는.

서랍 속 초콜릿처럼 위로의 방법을 몇 가지 준비해 놓으면 어떨까? 그중 예술 작품도 목록을 채운다. 며칠 전 박물관 관련 책을 준비하던 나에게 한 동료가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를 추천해주었다. 미술관 방문객의 심리를 담아냈다고 한다. 읽어 보니 미술관 에피소드는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예술의 위로는 포착해냈다. 한때 도시에서 반짝거리는 삶을 살았던 저자는 더는 그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혼자서 시골로 물러난다. 그때 한 친구가 도리스 레싱의 <금색 공책>을 선물했다.

혼자 남겨진 사람의 공허함을 엮어낸 이 소설을 읽으며 저자는 자신만 그런 일을 겪은 게 아니라고 위안을 얻는다. 조용히 속내를 읽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었고, 소설이 허구라 해도 누군가 자신의 것과 흡사한 고통을 겪었다는 이야기에 마치 털어놓은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 위로 뒤에야 저자는 혼자 있는 시간을 회복으로 인식했다. 어쩌면 고독은 마치 "잠"과 같은 게 아닐까? 불필요해 보이지만 살아가는 데 필연적이며 저항할 수도 없다.

▶▶▶(관련 인터뷰) "나는 미술관 경비원"…형의 죽음 잊기 위해 직업까지 바꾼 남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유럽회화관 (By André Lage Freitas) / 출처. 위키피디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유럽회화관 (By André Lage Freitas) / 출처. 위키피디아
내가 놓친 탐나는 책

그런데 예술의 매혹과 위로를 전달하는 진짜 ‘탐나는 책’은 따로 있다. 이 칼럼의 이름, 뜻과도 일치한다. 이를테면 본선까지 올랐다가 내가 판권 계약을 놓친 책이다. (사실 일 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수십 권이긴 하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저자의 인터뷰 영상을 무심히 보다가 훅 빠져들었다. 마침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어떤 감정을 느낄까?’라고 생각을 했던 터라 그랬을 것이다.
피터르 브뤼헐 <곡물 수확> (156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피터르 브뤼헐 <곡물 수확> (156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대학 졸업 후 유명 주간지 <뉴요커>의 5년 차 라이터였던 패트릭 브링리는 쌍둥이 형을 희귀병으로 잃었다. 평온무사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은 느닷없이 온다. 일상을 살아갈 수 없게 된 저자는 어딘가로 물러나기로 한다. 그곳은 도시의 바깥 같은 곳이었고 가장 아름다운 도피처인 미술관이었다. 형과 함께 자주 가던 공간이기도 했다. 그는 경이로운 그림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었다. 이 예술 감상이 자연만큼 위로를 줄까? 더할까, 덜할까? 그의 인터뷰 내용처럼, 모든 게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에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시간만큼은 천천히 흐른다.

현대 미술은 평론과 고급 갤러리의 놀이터라는 비판도 있지만, 유일무이하고 적어도 제대로 된 작품은 낚시질 광고를 하지 않는다. 비슷비슷한 복제 상품과 메시지 속에서 예술품이 각광 받는 이유다. 예술에는 역사가 스며들어 있다. 인간의 시간이 역사이니 어쩔 수 없다. 글 없이 상상만 남은 석기 시대의 토기에도 당시 사람들의 시간이 녹아 있다. 친구도, 전문가의 상담도 위로가 되지 않는 깊은 슬픔 속에서, 브링리는 브뤼헐의 <곡물 수확> 같은 그림을 한없이 바라보면서 오백 년 전 화가가 기록한 삶의 고단함에 공감되어 숨이 트이기 시작했다.
<백자 달항아리> (조선 18세기 전반), 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 달항아리> (조선 18세기 전반), 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요즘 커다란 몸집에 제작 과정상 약간 비뚤어질 수밖에 없는 달항아리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가 뉴트렌드가 된 것인가? 다이소에서 복을 담아준다고 산 3천 원짜리 유광 달항아리면 어떤가. 누군가 빚어낸 예술품은 연결감을 준다. 자연에선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상념이 흐르지만, 예술 앞에서는 거기 깃든 이야기에 온전히 몰입하기도 한다. 사람처럼 다가설 수는 없지만 그림과 공예품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 그리고 이야기가 담겨 있다. 현실 속 인간류에 지친 인간들도 ‘최애 유물’ 앞에서는 멍때리며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다.

정소연 세종서적 편집주간

▶▶▶['달항아리' 칼럼] 우리가 갖고 싶은 달항아리,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