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담론보다는 미세각론에, 사회보다는 개인의 내면에 천착하는 요즘 국내 소설의 흐름에 대하소설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 소설가 윤흥길(82·사진)이 최근 완간한 5부작 장편소설 <문신>은 명맥이 끊긴 듯한 국내 대하소설의 맥을 잇는 작품이다.윤흥길은 소설 <장마>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으로 현대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문단계 거장이다. 그가 자그마치 25년 걸려 집필한 이번 소설 <문신>은 2018년 1~3권이 먼저 발표된 뒤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 박경리문학상을 받았다. 얼마 전 4, 5권이 출간돼 완성됐다. 원고지 6500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소설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전라도에 있는 가상의 지역 산서면이다. 법의 빈틈을 파고들어 막대한 부를 쌓은 대지주 최명배 일가의 엇갈린 신념과 욕망, 갈등 등을 그려냈다. 부와 권력을 위해 적극적으로 친일 행보를 이어 온 최명배의 자식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비극의 시대를 마주한다. 큰아들 부용은 폐결핵에 걸리고 첫째 딸 순금은 약혼자의 죽음을 겪는다. 막내아들 귀용은 사회주의 운동에 필요하다며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고 재산을 가져간다. 그 와중에 강제징용과 징병의 서슬이 마을을 조여온다.작가는 소설의 발상이 우리 민족의 귀소본능을 담고 있는 두 가지 풍습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밝혔다. 하나는 전쟁터에 나갈 때 몸에 문신을 새기는 부병자자(赴兵刺字)의 풍습이다. 전쟁에서 죽으면 시신이라도 고향에 돌아와 묻힐 수 있도록 누군지 식별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표식이다. 다른 하나는 해외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이 고향을 그리며 아리랑 곡조에 맞춰 개사해 부른 ‘밟아도 아리랑’이다.소설 속 최명배가 보이는 모순적 행동은 제국주의의 모순을 나타낸다. 최명배는 조상신위(조상의 사진이나 위패)를 끔찍이 여기면서도 가장 먼저 창씨개명을 하고, 읍내에서 천황폐하 만세삼창을 외치는 인물. 악인이지만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 해학적 문장이 악인의 행동에도 웃음을 유발하고, 한편으로 동정과 연민을 느끼게 만든다.소설에는 윤흥길 소설 특유의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인간들이 등장한다. 어릴 적 열병을 앓아 정신지체아가 된 머슴 춘풍이, 부엌 어멈 섭섭이네 등 장소와 시대에서 이탈된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살고 있는 시대와 환경의 지울 수 없는 특징을 지닌 캐릭터다. 한 시대가 만들어 낸 산물로서의 인물들이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마치 판소리를 듣는 듯 리듬감 있는 문체와 풍성한 언어의 향연이 이어진다. 윤흥길은 “기존에는 독자의 가독성을 고려해서 문장을 썼지만, 이번 작품은 조금 불친절해지기로 마음먹었다”며 “판소리의 율조를 흉내 내기 위해 어순을 바꾸거나 조사를 생략하는 등 문장의 특색을 살리려고 신경 썼다”고 설명했다. 인물들의 대화엔 전라도 사투리나 비속어도 많이 녹아들어 있다.이번 작품은 윤흥길에게 작가로서 ‘필생의 역작’이다. 마지막 4, 5권을 마무리하기까지 5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건 집필 중 심혈관 질환 등으로 건강이 악화해서다. 그래도 펜을 놓지 않았다.“문학적 경향이 하나의 유행으로 수렴하는 건 굉장히 반대하는 쪽입니다. 후배 작가들에게 작품은 이렇게 써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다만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문학적 경향과는 다른 걸 고집스럽게 보여줄 나이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 어울리지 않는 불친절한 소설로….”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버스를 놓쳤는데 다음 버스가 5분 안에 오지 않으면 매우 불편하다.” “사람들은 집 옆에 지하철역이 들어올 수 있도록 로비한다.” “아무도 젠트리피케이션을 이유로 커피숍 유리창을 깨지 않는다.”최근 발간된 <한국 요약 금지>에서 저자 콜린 마샬(사진)은 ‘서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43가지 이유’로 이런 것들을 꼽았다. 마샬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뉴요커와 가디언 등에 한국에 대한 글을 기고해 온 칼럼니스트다. 이 책은 그동안 저자가 여러 매체에 영어로 기고한 글을 한국어로 다시 쓰고, 일부는 처음부터 한국어로 쓴 글 등으로 이뤄졌다. 한국과 한국인을 관찰자의 시각으로 샅샅이 분석했다.외국인의 시선에 한국이 어떻게 비치는지를 듣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낯설지 않은 일상을 낯선 이의 입을 통해 듣는 것만으로 일상이 덜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어서다. 저자는 10년 전부터 한국에서 살기 시작했고, 서울 신촌에서 지내다가 강릉 출신 한국 여성과 결혼해 화곡동 까치산시장 근처로 이사 갔다.마샬의 ‘한국 관찰기’는 수박 겉핥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한국에서 가장 인상 깊은 영화감독으로 꼽은 이가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이 아니라 홍상수 감독이란 점만 봐도 그렇다. 그는 홍상수 영화가 한국 사회의 특정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물론 봉 감독의 영화 ‘기생충’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나오지만, 영화보다 봉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어로 수상 소감을 한 것에 더 주목한다.저자의 렌즈는 한국 영화뿐 아니라 음식, 부동산, 상권, 자살 문제 등 한국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깊숙이 비춘다. 강원 춘천 하면 흔히 떠올리는 닭갈비보다 한 단계 더 들어가 춘천의 지하상가를 이야기한다. 스타벅스 바리스타의 이름표에 붙은 유머 섞인 영어 이름 등 한국을 깊이 이해해야만 알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일상을 기록했다.한국의 콤플렉스를 들여다보게 하는 내용도 많다. K컬처 열풍의 주역인 ‘강남스타일’ ‘기생충’ ‘오징어 게임’의 공통점에 대해 “한국 사회가 가진 피상적 측면과 불공정성, 폭력성을 민감하게 풍자했다”는 대목이 그렇다. 20세기에는 섬유, 자동차, 반도체가 한국을 풍요롭게 했지만 21세기엔 그 풍요가 가져온 ‘불만’이 수출 효자가 됐다는 얘기다.마샬은 ‘한국 전문가’보다는 ‘한국 코노셔(connoisseur)’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코노셔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는 데 집중하기보다 관심과 흥미를 꾸준히 유지하는 사람에 가깝다. 이 책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한국의 유행어를 변주해 한국을 아는 만큼 ‘즐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는 ‘한국 덕후’의 관찰기다.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소비자 심리학의 대가인 애런 아후비아 미국 미시간대 디어본 경영대학 마케팅 교수는 <사고 싶어지는 것들의 비밀>을 통해 인간이 사물과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것들의 비밀을 밝혀낸다. 그는 사람과 사물 사이의 차갑고 실용적인 관계에 감정적 온기를 불어넣은 ‘관계 난로’라는 개념을 제시한다.첫 번째 관계 난로는 의인화다. 마치 반려동물 같은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를 다른 사람과 연결해주는 것이다. 친구나 가족의 사진, 다른 사람에게 받은 선물, 다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나 물건,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되는 휴대폰 등이다. 마지막은 ‘자기감’이다. 특정 브랜드의 옷을 계속 입는 것, 어떤 음식을 먹는 것, 특정 자동차를 타는 것, 어떤 향수를 쓰는 것 등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표현하는 방식이 된다. 좋아하는 것에 소비하는 건 단순히 필요한 것을 사는 게 아니라 내적 만족감과 정체성을 높이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케팅 방법론을 넘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까지 전한다.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