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한 '플라잉 투르비용'…손목 위 시선을 훔치다
에르메스 시계의 역사는 1912년 찍힌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한다. 에르메스 자료보관소에서 발견된 이 사진의 주인공은 창립자 티에리 에르메스의 3대손 에밀 에르메스의 네 딸들이다. 사진 속 에밀의 둘째 딸 자클린이 손목에 차고 있는 가죽 스트랩 시계가 눈에 띈다. 이게 바로 최초의 에르메스 시계다.

자클린의 시계는 포르트-오이뇽으로 불린다. 포르트는 프랑스어로 ‘문’을, 오이뇽은 ‘양파’를 뜻한다. 가죽 스트랩으로 회중시계를 마치 양파처럼 감쌌다는 의미다. 말 안장을 만드는 기술을 이용해 에밀 에르메스가 직접 가죽 스트랩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승마할 때 발 디디는 ‘등자’가 손목에

버킨백 켈리백 등 럭셔리 가죽 가방으로 잘 알려진 에르메스는 1837년 탄생했다. 프랑스 파리 외곽 지역에 문을 연 마구(馬具) 용품점이 그 효시다. 말 안장 등 가죽 마구를 만들어 명성을 쌓은 에르메스는 유럽 왕실과 귀족 가문에까지 제품을 공급했고 20세기 들어서는 벨트, 가방, 의류로 점차 사업영역을 넓혔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한 '플라잉 투르비용'…손목 위 시선을 훔치다
자클린을 위한 포르트-오이뇽이 만들어진 건 1912년이지만 에르메스가 브랜드 차원에서 시계를 제작해 팔기 시작한 건 1928년이다. 브랜드 탄생 90년 만이다. 프랑스 파리 생토노레 24번가 매장에 시계 코너를 차렸는데, 스위스 시계 전문 제조사가 만든 시계에 에르메스의 디자인을 입혀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본격적으로 시계산업에 뛰어든 건 그로부터 50년 후다. 에르메스 가문의 5대손인 장 루이 뒤마 회장이 취임하면서부터다. 1978년 스위스 시계산업의 중심인 비엔에 시계 전문 자회사인 라몽트르에르메스까지 설립하며 전문 시계 제조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에르메스 시계의 핵심 컬렉션인 아소가 나온 것도 이때다. 아소는 아치 형태의 물건이라는 뜻이다. 말을 탈 때 발을 디디는 등자에서 영감을 얻었기에 붙인 이름이다.

21세기 들어서는 시계 무브먼트에 적극 투자했다. 무브먼트 제조사인 보셰매뉴팩처 지분을 인수하고, 다이얼 제조사 나테베르, 케이스 제조사 조세프에랄드의 지분을 사들였다. 에르메스만의 디자인을 넘어 에르메스만의 무브먼트를 완성하기 위함이다. 가죽 제품에 뿌리를 둔 에르메스가 오늘날 독창적인 무브먼트와 컴플리케이션(시계에 들어가는 복잡한 기능)으로도 인정받게 된 이유가 여기 있다.

독창성에 대한 집념…컴플리케이션 기술의 끝

에르메스는 현재 전통적인 컴플리케이션뿐 아니라 에르메스만의 독특한 컴플리케이션을 적용한 다양한 시계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에르메스에서는 처음으로 플라잉 투르비용을 적용해 만든 ‘아소 리프트 투르비용 미닛리피터’는 에르메스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하이 컴플리케이션 모델 중 하나다. 중력에 의한 오차를 줄여주는 기계 장치인 투르비용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능이 플라잉 투르비용이다. 에나멜 다이얼 위에 말 모양으로 커팅된 프레임 사이로 드러나는 무브먼트가 특징이다. 투르비용 설계에 사용된 두 개의 H 문양이 합쳐지며 만들어지는 더블 H 모양은 파리 생토노레 에르메스 매장의 상징적인 모티브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됐다. 한정판인 만큼 그동안은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지난달 소수 물량이 들어와 관심을 모았다.
아소 르 탕 보야주
아소 르 탕 보야주
‘아소 르 탕 보야주’와 ‘아소 레흐 드라룬’은 에르메스의 특별한 컴플리케이션이 적용된 제품들이다. 2022년 제네바시계그랑프리(GPHG)에서 여성·남성용 컴플리케이션의 2개 부문을 수상한 아소 르 탕 보야주는 ‘여행자의 시간’이라는 제품 이름에 걸맞게 24개 도시의 시간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현지 시각을 보여주는 작은 다이얼이 마치 위성처럼 회전하는 독특한 메커니즘이 눈길을 끈다.

아소 레흐 드라룬은 전통적인 ‘문페이즈’(달의 위상 변화를 보여주는 기능)를 에르메스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다이얼 위에 그려진 두 개의 달 모티브 위로 서브다이얼 2개가 회전하면서 달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면서 현재 시점의 달 모양을 보여준다.

‘슬림 데르메스 퍼페추얼 캘린더’는 가장 정교한 컴플리케이션 중 하나로 꼽히는 퍼페추얼 캘린더 형태의 시계다. 매월 마지막 날짜를 30일 또는 31일로 자동 조정하고,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윤년도 자동 반영한다. ‘아소 타임 서스펜디드’에는 다이얼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흐르는 시간을 잠시 멈출 수 있는, 세계 최초로 에르메스가 개발한 기능이 적용됐다.

양지윤 기자 y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