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혐의를 벗은 오펜하이머와 인셉션에서 빠져나온 코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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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윤성은의 Cinema 100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 3주차에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광복절 개봉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지만 첫 날 기록한 관객수 55만 명은 이번 여름 한국 블록버스터들을 모두 뛰어넘은 수치일뿐 아니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역대 최고 오프닝이기도 하다. 전작인 ‘테넷’(2020)은 호불호가 갈렸음에도 불구하고 놀란에 대한 한국 관객들의 애정과 신뢰는 식지 않고 있다.
한 두 개의 히트작으로 일약 스타 감독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놀란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미행’(1998) ‘메멘토’(2001) ‘다크나이트’ 3부작(2005-2012) ‘인셉션’(2010)과 ‘인터스텔라’(2014) ‘덩케르크’(2017)로 이어지는 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는 동시대 할리우드 감독 중 누구도 갖지 못한 대중적 티켓 파워를 갖게 했다. ‘오펜하이머’는 실존 인물의 삶에 천착한 그의 첫 번째 영화지만 전작들에서 보여준 영화적 스타일과 주제의식이 잘 녹아 있다. ‘인셉션’은 ‘다크나이트’ 3부작이 진행중이던 2010년 여름에 개봉해 국내에서 약 601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던 작품으로, 참신한 소재와 놀라운 비주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인간의 무의식에 들어가 기억을 삽입하는 ‘인셉션’ 기술은 자꾸만 주인공의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메멘토’의 단기기억상실증과 정반대의 지점에 있으나 그것으로 인해 열리는 서사의 무궁무진한 가능성만큼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국제적 수배자가 되어 있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굴지의 기업가 ‘사이토’(와타나베 켄)에게 달콤하고도 위험한 제안을 받는다. 경쟁기업의 수장 ‘로버트 피셔’(킬리언 머피)의 꿈 속에 들어가 기업 운영에 대한 결심을 바꿔주면 수배를 풀어주겠다는 것이다. 코브는 실패하면 영원히 꿈 속에 갇혀 버릴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문가들을 섭외해 로버트의 꿈으로 들어간다. 코브 일행은 돌발적인 상황들을 맞이하면서도 여러 겹의 꿈으로 들어가는 미션을 차근차근 수행하지만,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코브의 죄책감이 작전에 걸림돌이 된다.
죄책감 만큼 놀란의 영화들을 여러 편 꿰어낼 수 있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코브는 종종 그의 앞에 나타나 죽음을 요구하는 아내의 환상 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며, 자신의 상처가 현실에서 튀어나오지 않도록 계속 억압하고 있다. 용의자 추격 중 동료를 사살하는 사고를 낸 도머(‘인썸니아’), 병 때문에 아내를 죽인 레너드(‘메멘토’)와 부모님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브루스(‘다크나이트’ 3부작), 그리고 대랑 살상 무기를 개발한 후 혼란스러워 하는 오펜하이머(‘오펜하이머’) 또한 코브와 동일선상에서 해석가능한 인물들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연설 자리에서 원폭 피해자들의 환영을 보는 오펜하이머의 분열된 자아처럼 코브 역시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내의 환영을 보고 흔들린다. 한 개인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영화적 언어로 표현하는데 탁월한 놀란은 ‘인셉션’에서도 초현실적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단절을 통해 코브의 상태를 묘사한다. 또한, ‘인셉션’은 배경 설명 없이 시작하는 도입부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을 제시하고, 꿈을 현실로 착각하는 인물들을 통해 주체성의 문제를 건드린다. 즉, 로버트는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아리아드네가 설계한 인셉션의 세계 속에서 코브 일행이 유도하는 데로 움직이게 된다. 종종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코브 또한 인셉션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함으로써 꿈을 벗어나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 사명이 있다.
인셉션이라는 기술이 가진 이데올로기적 속성은 ‘오펜하이머’에서 역사적 현실로 표면화된다. 오펜하이머는 메카시즘의 프레임에 갇혀 극도로 혼란스러워 하며 자신의 과거를 꺼내놓는다. 그는 원폭 투하 이후 그의 가치관에 생긴 변화가 애국심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입증해야만 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프로타고니스트를 좋아하는 놀란에게 오펜하이머는 최적의 실존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오펜하이머가 윤리적 죄책감을 이겨내고 과학자로서 자신이 업적과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구소련의 첩자라는 혐의를 벗고 집으로 돌아가는 결말은 코브가 인셉션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아이들을 만나는 결말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작가주의 영화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재,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면서도 작품들 사이에 유기적 관계를 보여주는 몇 안되는 감독으로서 본인의 입지를 더욱 탄탄히 하고 있다. 개봉한 지 13년이 지났지만 ‘인셉션’은 조금도 나이 들지 않은 상상력과 영상미를 보여주는 놀란 영화의 정수 같은 작품이다. 아마 그의 차기작에서도 ‘인셉션’의 모티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 두 개의 히트작으로 일약 스타 감독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놀란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미행’(1998) ‘메멘토’(2001) ‘다크나이트’ 3부작(2005-2012) ‘인셉션’(2010)과 ‘인터스텔라’(2014) ‘덩케르크’(2017)로 이어지는 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는 동시대 할리우드 감독 중 누구도 갖지 못한 대중적 티켓 파워를 갖게 했다. ‘오펜하이머’는 실존 인물의 삶에 천착한 그의 첫 번째 영화지만 전작들에서 보여준 영화적 스타일과 주제의식이 잘 녹아 있다. ‘인셉션’은 ‘다크나이트’ 3부작이 진행중이던 2010년 여름에 개봉해 국내에서 약 601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던 작품으로, 참신한 소재와 놀라운 비주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인간의 무의식에 들어가 기억을 삽입하는 ‘인셉션’ 기술은 자꾸만 주인공의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메멘토’의 단기기억상실증과 정반대의 지점에 있으나 그것으로 인해 열리는 서사의 무궁무진한 가능성만큼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국제적 수배자가 되어 있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굴지의 기업가 ‘사이토’(와타나베 켄)에게 달콤하고도 위험한 제안을 받는다. 경쟁기업의 수장 ‘로버트 피셔’(킬리언 머피)의 꿈 속에 들어가 기업 운영에 대한 결심을 바꿔주면 수배를 풀어주겠다는 것이다. 코브는 실패하면 영원히 꿈 속에 갇혀 버릴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문가들을 섭외해 로버트의 꿈으로 들어간다. 코브 일행은 돌발적인 상황들을 맞이하면서도 여러 겹의 꿈으로 들어가는 미션을 차근차근 수행하지만,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코브의 죄책감이 작전에 걸림돌이 된다.
죄책감 만큼 놀란의 영화들을 여러 편 꿰어낼 수 있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코브는 종종 그의 앞에 나타나 죽음을 요구하는 아내의 환상 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며, 자신의 상처가 현실에서 튀어나오지 않도록 계속 억압하고 있다. 용의자 추격 중 동료를 사살하는 사고를 낸 도머(‘인썸니아’), 병 때문에 아내를 죽인 레너드(‘메멘토’)와 부모님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브루스(‘다크나이트’ 3부작), 그리고 대랑 살상 무기를 개발한 후 혼란스러워 하는 오펜하이머(‘오펜하이머’) 또한 코브와 동일선상에서 해석가능한 인물들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연설 자리에서 원폭 피해자들의 환영을 보는 오펜하이머의 분열된 자아처럼 코브 역시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내의 환영을 보고 흔들린다. 한 개인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영화적 언어로 표현하는데 탁월한 놀란은 ‘인셉션’에서도 초현실적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단절을 통해 코브의 상태를 묘사한다. 또한, ‘인셉션’은 배경 설명 없이 시작하는 도입부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을 제시하고, 꿈을 현실로 착각하는 인물들을 통해 주체성의 문제를 건드린다. 즉, 로버트는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아리아드네가 설계한 인셉션의 세계 속에서 코브 일행이 유도하는 데로 움직이게 된다. 종종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코브 또한 인셉션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함으로써 꿈을 벗어나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 사명이 있다.
인셉션이라는 기술이 가진 이데올로기적 속성은 ‘오펜하이머’에서 역사적 현실로 표면화된다. 오펜하이머는 메카시즘의 프레임에 갇혀 극도로 혼란스러워 하며 자신의 과거를 꺼내놓는다. 그는 원폭 투하 이후 그의 가치관에 생긴 변화가 애국심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입증해야만 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프로타고니스트를 좋아하는 놀란에게 오펜하이머는 최적의 실존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오펜하이머가 윤리적 죄책감을 이겨내고 과학자로서 자신이 업적과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구소련의 첩자라는 혐의를 벗고 집으로 돌아가는 결말은 코브가 인셉션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아이들을 만나는 결말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작가주의 영화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재,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면서도 작품들 사이에 유기적 관계를 보여주는 몇 안되는 감독으로서 본인의 입지를 더욱 탄탄히 하고 있다. 개봉한 지 13년이 지났지만 ‘인셉션’은 조금도 나이 들지 않은 상상력과 영상미를 보여주는 놀란 영화의 정수 같은 작품이다. 아마 그의 차기작에서도 ‘인셉션’의 모티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