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 부산점 전시
최욱경의 흑백 드로잉에 담긴 생각의 파편들
대담한 필치와 강렬한 색채의 추상화로 잘 알려진 여성 작가 최욱경(1940∼1985)은 생전 드로잉에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

특히 미국 유학 시절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한 이후 단순히 연습이라고 생각했던 드로잉 작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다시 기본기를 충실히 하고자 방대한 양의 소묘를 제작하기도 했다.

작가는 "2년간 그렇게 그리고 나니까 졸업할 무렵엔 '아, 이것이 그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최욱경의 흑백 종이 드로잉을 모은 전시가 부산 수영구 망미동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의 드로잉에는 종종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듯한 문구가 발견된다.

언뜻 자화상처럼 보이는 인물을 그린 '무제'에는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겠다'라는 문구가 영문으로 적혀 있다.

또다른 '무제' 작품에서는 '나는 미국인인가'(AM I AMERICAN)라는 문구도 눈에 띈다.

미국 유학 시절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작가의 심정이 드러난 작업이다.

최욱경의 흑백 드로잉에 담긴 생각의 파편들
1969년 3월22일이라는 날짜가 적힌 또다른 '무제' 작품에는 마치 자궁에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장면과 함께 '때가 되면 해가 뜰까.

(중략) 과연 내게 때가 오긴 할까'라는 문구가 역시 영문으로 적혀 있다.

암담한 현실에서 미래 희망을 찾아보려는 마음을 표현한 듯 보인다.

최욱경은 시인이기도 했다.

1972년 '낯설은 얼굴들처럼'이란 제목으로 유학 시절 쓴 45편의 시를 묶은 국문 시집을 펴냈다.

이번 전시에는 이 시집에 포함된 16점 삽화 중 6점이 나왔다.

국제갤러리는 "다수의 회화 작품이 일견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를 전달하는 식이었다면 이번 전시의 드로잉들은 작가의 일상을 채우던 생각의 파편들, 일기장 속 미완의 이야기들을 엿보는 듯 하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콩테와 목탄 등으로 빠르게 작업했던 인체 크로키 9점도 10월22일까지 함께 전시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