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번 빅토리아국립미술관
멜번 빅토리아국립미술관
“이 음악은 꼭 일요일 오후 같아”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감독을 맡은 영화 '별이 된 소년(2005년)' 의 주제곡인 ‘샤이닝 보이 & 리틀 랜디(Shing boy & Little Randy)’를 들은 초등학생 첫째 아들의 말입니다. 평소 “‘뉴진스의 하입보이’보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레인(Rain)’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 어린이가 듣기에는 특유의 서정적이고 차분한 선율이 (숙제가 잔뜩 남아 부담스럽고 아쉽기만 한) 일요일 오후를 닮았다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 이 음악을 들을 때 오카리나 같기도 피리 같기도 한 첫 소절을 듣자마자 회상에 젖기도 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노스탤지어가 느껴지는 음악이니 사카모토 류이치가 아니라 셀틱뮤직의 거장인 칼 젠킨스를 떠올렸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별이 된 소년'은 아기 코끼리와 소년의 순수한 우정을 다룬 영화입니다. 그렇기에 아마도 특정 요일과는 무관하겠으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명작 '아무도 모른다(2005년)'서 의젓한 맏이 역할을 맡았던 야기라 유야가 주인공을 맡았다는 점이 또 기막힌 우연입니다. 이젠 음악을 듣기만 해도 야기라 유야처럼 듬직한 ‘우리집 첫째’가 떠오르고 코끼리와 일요일도 생각납니다. 그날 이후로 이 음악은 일요일 오후에만 듣게 됐습니다. 음악에 개인적인 기억이 층층이 쌓였습니다.
스티브 맥커리_온 리딩 중
스티브 맥커리_온 리딩 중
어느 날 밤에는 일산 킨텍스 전시장서 운전을 시작해 자유로에 진입하려는데 나들목의 난간에 옛날 사무실의 형광등처럼 긴 조명을 길게 나열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요즘 유행하는 다중우주서 차원 이동을 하는 통로와 같았다고 할까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에서 묘사된 블랙홀, 루이스 호르헤 보르헤스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을 차용한 무한대의 도서관처럼 길게 늘어선 길이 몽환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때 또 우연히 라디오에서는 에드워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9번 ‘님로드(Nimrod)’가 흘러나왔습니다. 도입부부터 반복되는 현악기 선율을 들으며 철로처럼 긴 조명 사이를 통과하는 기분은 흡사 우주 속을 유영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시간 이후로 제게 ‘님로드’는 한스 짐머의 ‘퍼스트 스텝(First Step)’이나 막스 리히터의 ‘온 더 네이처 오브 데이라이트(on the nature of daylight)’보다 더 ‘우주적인’ 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오래 전 티베트 라싸부터 네팔 카투만두를 여행하면서, 성지를 향해 가는 그 곳의 순례자들 옆으로 먼 거리를 계속 걸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조지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와 클로드 드뷔시의 ‘달빛’을 끊임 없이 반복했습니다.

원래 ‘랩소디 인 블루’는 대공황기 뉴욕 맨해튼의 정경,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사내처럼 페도라를 쓴 모습이 떠오르는 음악입니다. 인상주의 시대의 음악인 ‘달빛’도 당대에 활동했던 드가, 모네의 풍경을 떠올리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티베트의 척박한 환경은 맨해튼이나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와 달랐지만, 두 음악은 걸음과 함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작곡가의 특정한 의도를 미리 공유 받거나 제목 등 배경지식조차 없다면, 얽힌 기억은 지극히 개인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모든 길과 건축, 도시도 배경음악을 곁들이면 그때부터 특별한 장소가 됩니다. 장소와 내가 인연을 맺게 된다고 할까요?

요즘 보행자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주변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해주는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착용하고 걷는 일도 길, 장소와 깊은 인연을 맺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선 이어폰이 없으면 또 어떻습니까? 집에서 미리 들어둔 음악을 상상하기만 해도 나만의 배경곡이 됩니다)
청계천
청계천
저명한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미셸 드 세르토는 가장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우리의 도심걷기(보행)를 일종의 사회적 저항행위로 간주하고 발화(말하기)와 동일시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추상적 공간 속에 둥둥 떠다니는 말을 능동적으로 차용해서 나만의 언어로 ‘발화’하는 일은 곧 사회 체계가 구축해놓은 장소와 길을 자유롭게 내딛는 ‘보행’과 같다는 설명입니다. 적극적으로 발화하는 행위인 ‘걷기’에 음악까지 접목했으니 이제부터 그 장소와 길은 완전히 ‘내 것’이 된 셈이지요.

최근에는 청계천 변이나 경의선 숲길을 거닐며, 미셸 페트루키아니의 ‘루킹 업(Looking up)’을 즐겨 들었습니다. 요절한 천재 피아니스트 페트루키아니의 경쾌한 곡을 듣고 있자니 청계천은 서유럽의 여느 하천보다 청량하고 윤슬은 나를 위해 빛나는 것만 같습니다. 사실 이 음악은 결혼 전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자주 들었는데, 당시의 설렘도 한 겹 더해져 발걸음을 더욱 힘차게 만듭니다.

마음껏 걸으며 장소를 경험하고 궤적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우리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데 음악까지 더해지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녁엔 배경음악을 겸하고 산책에 나서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