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술 발달과 세계화로 보급 촉진…신간 '총, 선, 펜'
폭력과 전쟁이 낳은 성문 헌법은 어떻게 세계로 확산했나
1755년 7월 지중해 코르시카섬의 '반군 총사령관이며 행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파스칼레 파올리(1725∼1807)는 넉 달 뒤 이탈리아어로 된 10쪽 분량의 문서를 작성한다.

인쇄기는커녕 종이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던 파올리는 글자가 적힌 부분을 면도칼로 긁어낸 오래된 편지를 백지 대신 사용했다.

형식적으로는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이 문서는 선구적 성문 헌법으로 꼽히는 코르시카 헌법이다.

1787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된 헌법의회에서 제정된 미국 헌법보다 32년이나 앞섰다.

이로부터 약 160여년이 지난 1914년 무렵이 되면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의 여러 지역에서 정부에 제약을 부과하고 다양한 권리를 약속하는 성문 헌법이 작동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법치주의는 국가와 사회를 규율하는 기본 원리로 여겨지며, 그 중심에는 문서로 작성되고 일정한 절차를 거쳐 공포된 헌법이 있다.

영국 출신 역사학자 린다 콜리는 최근 번역 출간된 '총, 선, 펜'에서 성문 헌법의 등장과 확산 과정을 지역과 시대를 넘나들며 추적한다.

책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폭력과 전쟁(총), 세계화(배·선박), 인쇄술과 통신 기술(펜)의 발달을 성문 헌법이 보편적인 규범으로 자리 잡는 데 영향을 미친 요소로 꼽는다.

전쟁이라는 위기를 거쳐 출범한 새 정권은 질서를 재정비하고, 논쟁적인 경계를 선언하거나 국내외 무대에서 자신의 존재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성문 헌법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폭력과 전쟁이 낳은 성문 헌법은 어떻게 세계로 확산했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정권이나 국가는 성문 헌법을 이용해 권력을 재편하거나 체재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전쟁이 육상전뿐만 아니라 해상 전투를 포함해 다변화하고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해지면서 통치자는 자금과 병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법적·제도적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새로운 형태의 헌법은 남성 거주민이 세금과 징병의 의무를 수락하는 대신 선거권과 같은 권리를 부여받도록 거래를 보장하는 장치로서 기능했다.

고전적인 관점에서는 헌법의 등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혁명에 주목했지만, 혁명 역시 인간의 폭력이 대대적으로 표출되는 양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인쇄술이나 통신 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이들이 서로의 생각을 교류하거나 모방할 기회를 확대했다.

미국 헌법은 인쇄술의 발달 덕분에 19세기 내내 미국 독립선언서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각국에서 성문 헌법이 도입됨에 따라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다양한 국가의 헌법 정보에 관심을 갖게 됐고 시대의 흐름을 포착한 출판업자들은 1790년대부터 여러 국가의 헌법을 묶어서 발행하며 변화를 촉진했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전신인 아일랜드자유국(1922∼1937) 정부는 자국 헌법 외에 18대 국의 헌법을 실은 '세계 헌법 선집'이라는 방대한 책을 발행하기도 했다.

폭력과 전쟁이 낳은 성문 헌법은 어떻게 세계로 확산했나
인도의 민족주의자이며 후일 헌법 제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베네갈 시바 라오(1891∼1975)는 1933년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때 '세계 헌법 선집'을 접했다.

그는 이 책에 담긴 주요 내용을 인도에서 번역 출간하면 헌법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해 아일랜드자유국으로부터 인도판 제작 허가를 받았으며 1934년 인도 마드라스에서 '세계 헌법 선집' 신판을 펴냈다.

런던은 1820년 무렵 거주민에 약 160만명에 달하는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고, 성문 헌법이 확산하는 바탕을 제공한다.

거대한 도시가 지닌 부와 국제적 영향력은 세계 각국 정치 개혁가와 활동가를 끌어들였으며 런던은 이내 금융 도시로서 독보적인 위상을 구축했다.

당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통치에서 벗어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남아메리카의 신흥 국가들은 대규모 국채를 발행했다.

런던은 콜롬비아, 칠레, 페루,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채권을 흡수하는 시장이었다.

투자자들은 큰돈을 투입한 대서양 건너편 국가의 정치 상황에 자연스럽게 촉각을 곤두세웠으며 영국 신문에는 남미 국가의 헌법에 관한 정보가 연일 실렸다.

정보만 교환된 것이 아니다.

런던 금융 시장을 거쳐 남미에 유입된 돈의 일부는 현지 혁명 정부의 자금으로 사용됐다.

런던의 성장이 남미 신흥 정권에 여유를 주고 이들이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정착시킬 토대가 된 셈이다.

폭력과 전쟁이 낳은 성문 헌법은 어떻게 세계로 확산했나
헌법의 오랜 역사를 고찰한 저자는 "헌법은 오류를 면치 못하는 인간종이 창조한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창조물"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헌법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론을 편다.

"헌법은 그것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그저 정치인, 법정 그리고 관련 인구가 그에 대해 생각하고 필요할 때면 그것을 개정하고,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도록 만드는 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능력과 의향을 가지는 한도 내에서만 기능한다.

"
에코리브르. 김홍옥 옮김. 616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