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본선행 이끈 주장 출신 유영실 서울시청 감독 "체제 비판 앞서 성적 내야"
"왜 독일전처럼 1·2차전 못했을까…세대교체는 정교하고 심도 있게"
[여자월드컵] 벨 감독에 날 선 비판…유영실 "불씨 살릴 기회였는데…"
2023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에서 한국 여자 축구대표팀이 2패째를 당한 지난달 30일.
여자 실업축구 WK리그 감독들은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애들레이드의 하인드마시 스타다움에서 고개를 숙인 선수들을 보고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여자축구연맹의 지원으로 호주에서 열린 콜롬비아, 모로코전을 관전한 이들의 행선지는 갑작스럽게 시드니로 정해졌다.

시드니 외곽에 자리 잡은 대표팀 캠프를 방문한 장외룡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7월 31일 시드니 모처에서 장 부회장에게 여자축구계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모로코전 직후 기자회견 중 콜린 벨 감독이 WK리그를 비롯한 한국 여자축구 시스템의 '전면 개혁'을 주창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간담회 중 답답한 마음에 먼저 자리를 뜬 유영실 서울시청 감독은 "우리 애들은 더 잘할 수 있는데…"라며 벨 감독의 지도력에 거듭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달 3일 FIFA 랭킹 2위 독일과 최종전을 1-1로 비기는 반전을 썼지만, 벨호는 16강에 오르지 못하고 귀국했다.

유 감독은 8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자신이 보였던 '아쉬움의 이유'를 밝혔다.

[여자월드컵] 벨 감독에 날 선 비판…유영실 "불씨 살릴 기회였는데…"
20년 전 대표팀 주장으로 한국 축구 최초의 여자 월드컵 본선행을 이끈 유 감독은 특히 이번 대회에서는 '성과'가 중요했다고 짚었다.

유 감독은 "여자축구 인프라, 환경을 넓힌 건 언제나 월드컵"이라며 "월드컵 성적이 뒷받침돼야 불씨가 살아나는 걸 아니까 4년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이어 "이 4년은 한국 여자축구 사상 가장 확실한 투자가 이뤄진 기간이다.

좋은 선수들에 외국인 감독님도 모셨으니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이 여자축구의 당분간 미래를 결정할 기회였다"며 "전반적으로 침체하는 분위기인데 이런 양상이 더 심해지고, 더 어려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4년을 온전히 준비 기간으로 받았던 만큼, 선전을 통해 언론의 주목·기업의 후원을 끌어내 시장 규모를 키울 '적기'였다는 진단이다.

유 감독은 이런 '기회의 창'이 자주 열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유 감독은 "대표팀은 기업 등이 뛰어들 '시장'을 만든다.

국민들의 인식도 바꿔주고, 또 축구를 더 하고 싶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이 쌓여 미래가 되고, 지금 성적이 곧 나은 미래를 만드는 밑바탕"이라며 "벨 감독님이 대표팀 수장으로 (여자축구의) 행정적 문제점까지 조율해야 하는 입장인 건 이해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성적을 내는 게 감독으로서 급한 임무였다"고 짚었다.

[여자월드컵] 벨 감독에 날 선 비판…유영실 "불씨 살릴 기회였는데…"
벨 감독은 모로코전 패배로 16강행 불씨가 꺼진 후 기자회견에서 WK리그부터 시작해 유소녀로 이어지는 '축구 피라미드'의 역동성이 곧 대표팀 경쟁력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이 말처럼 대표팀 경쟁력이 여자축구 생태계의 '산물'이지만, 일방적으로 영향만 받는 관계는 아니다.

대표팀 역시 성적을 내 생태계를 살찌울 '기폭제'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나오고서야 벨 감독은 "한국 여자축구가 잘되도록 하겠다"며 책임감을 보였다.

이때 발언을 언급한 유 감독은 "1, 2차전은 WK리그 수준의 경기력도 나오지 않았다"며 날 선 비판을 쏟았다.

그러면서 "벨 감독님께서는 환경을 언급하셨지만,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주체'이기도 하다"며 "감독님 말씀처럼 시스템을 바꿀 부분도 많지만, 당장 고착된 게 현실이다.

이를 움직이는 게 대표팀의 힘"이라고 지적했다.

유 감독의 실망이 깊은 건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지난해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준우승을 거둔 데 이어 월드컵 직전 평가전 3경기를 모두 이기자 기대감이 솟았다고 했다.

"준비 과정은 참 좋았다.

우리의 축구를 보여줬다"고 돌아본 유 감독은 벨호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냉정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단단히 작심한 유 감독이지만, 벨호가 독일전에 보여준 경기력에는 호평도 했다.

[여자월드컵] 벨 감독에 날 선 비판…유영실 "불씨 살릴 기회였는데…"
오히려 독일전 경기력이 왜 1, 2차전에는 나오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 감독은 "선수들은 모든 경기를 독일전처럼 할 수 있다"며 "이제 슬슬 투지가 보이고, 기술적 역량도 나오는데 이제 16강에 올라갈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벨 감독은 대회 최연소 선수인 2007년생 케이시 유진 페어(PDA), 2002년생 유망주 천가람(화천 KSPO)을 선발로 내는 파격적 전술을 꺼냈고, 이런 전략이 적중해 초반 독일을 몰아붙였다.

리그에서 상대하는 천가람을 두고 "벨 감독님께서 말씀하시는 힘·지구력·속도를 다 갖춘 선수"라고 극찬한 유 감독은 이제 '정교한' 세대교체를 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 감독은 "내가 현역일 때도 그렇고, 우리가 세대교체를 효율적으로 하지 못했다"며 "세대교체를 명목으로 전부 바꿔버리면 전부 다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대교체를 그냥 하면 노장 선수들의 경험과 역량을 모두 날릴 수도 있다"며 "심도 있으면서 효율적인 방식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짚었다.

이와 관련, 벨 감독은 지난 5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후 "감독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에 대한 이유를 분석하는 게 내 역할"이라며 "냉정하게 분석하겠다.

배우고 경험한 것을 앞으로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월드컵] 벨 감독에 날 선 비판…유영실 "불씨 살릴 기회였는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