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스킬HR로 앞서가는 기업들
대퇴사 시대에서 대잔류(Big Stay) 시대로 넘어왔다. 불투명한 경기 전망, 테크기업의 대량 해고로 인해 미국 근로자들의 퇴사 행진이 멈추는 추세다.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은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매일같이 갱신되는 챗GPT의 활약담과 자동화 테크놀로지 소식은 국적을 막론한 직장인들의 마음속에 언젠가 기계가 나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심고 있다.

눈깜짝할 사이에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한 기업의 고민도 늘어나고 있다. 경쟁우위 선점을 위해 기술력과 인재를 빠르게 확보해야 하며, 팬데믹과 같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에 침착하게 대처해야 한다. 인력과 인건비 효율화 방안을 모색함과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고용안정에도 신경써야 한다.

구성원과 기업 모두의 불안과 혼란을 한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만능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만 다양한 비즈니스 시나리오와 조직·인재 관리 방안을 실험해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는 있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은 미래 준비의 일환으로 ‘스킬 중심 HR’을 도입하고 있다. 스킬 중심 HR은 구성원의 다양한 능력과 잠재력에 집중하며 이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인사관리 방식이다. 직무 이력과 학력보다는 실질적 전문성에 따라 채용, 육성, 평가가 이뤄진다.

스킬 기반의 인사체계는 조직이 미래를 대비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 걸까? 스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를 HR에 정착시킨 선도 기업 사례에서 답을 엿볼 수 있다.

IBM은 2000년대 초반부터 스킬 체계를 구축한 스킬 중심 HR의 대표 선발주자다. 빠른 사업영역 확장과 글로벌 진출로 관리해야 할 조직, 인력의 규모가 점차 커진 시기다. 사업, 지역과 무관하게 통용되는 글로벌 인력관리 체계가 필요했기에, 조직별로 상이했던 직무와 스킬의 표준화 작업에 착수했다.

표준 스킬 체계 정립 과정에서 IBM은 기존 외부업체에 맡기던 업무를 내부에서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스킬 규명으로 등잔 밑 어둠 속에 있던 내부 인력의 역량이 가시화된 것이다. 이로 인해 전세계에 분포한 내부 인재를 발굴하고 아웃소싱 비용을 절감했다.
스킬 체계가 가져온 성공은 IBM HR체계 혁신의 발판이 된다. 2016년, CEO 지니 로메티는 미래 인재상으로 뉴칼라(New Collar)를 제시한다. 뉴칼라는 기존의 블루 칼라, 화이트 칼라의 이분법을 탈피한 전문성 보유 인력을 말한다. 이는 명문대 학위가 아니라 실질적 스킬 보유 인재를 채용, 육성하는 IBM의 인사전략 혁신을 보여준다. 실제로 미국 IBM 본사 인력 3분의 1은 뉴칼라에 해당된다.

도브, 바셀린 등의 브랜드로 유명한 유니레버는 스킬 기반의 경력이동 프로그램 덕에 코로나 위기를 순탄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유니레버는 스킬 중심 HR을 통해 지속가능 경영을 강화하고자 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 업무 자동화로 인해 직원들의 일자리가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구성원의 새로운 전문성 습득과 고용가능성(Employability) 강화를 위한 체계를 목표로 삼았다.

유니레버는 다양한 경력개발 프로그램과 더불어 사내 이동 및 프로젝트 공유 플랫폼인 플렉스(Flex Experiences)를 개발한다. 플렉스를 통해 구성원은 경력목표와 보유 스킬을 프로필에 등록하고 다양한 프로젝트에 지원할 수 있다. 조직은 필요 인재를 쉽게 찾을 수 있으며, 구성원은 본인의 능력을 최적으로 활용하고 확장할 수 있는 직무 경험을 쌓는다.

플렉스의 진가는 팬데믹 시기에 빛을 발했다. 국가 간 교류가 봉쇄되고 재택근무가 권고되는 상황에서 인력을 조정하고 팀을 구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유니레버는 플렉스를 적극 활용하여 스킬의 수요와 공급을 빠르게 일치시켰다. 인력 수요가 시급한 조직에 스킬 보유 인재를 재배치하며 코로나19 발생 이후 3개월 동안 구성원 9000여명을 성공적으로 이동시켰다. 더불어 약 700건 이상의 핵심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팬데믹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석유 슈퍼메이저 기업인 토탈에너지스(TotalEnergies)는 신재생에너지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스킬 중심 HR로 전환 중이다.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2050년까지 사업 포트폴리오의 90% 이상을 차지하던 석유·천연가스 비중을 25%로 축소하고 수소, 풍력 및 태양광 등의 그린에너지 비중은 75%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대대적인 사업모델 전환을 위해서는 새로운 영역의 전문성이 필요하다. 축소가 예견된 석유, 천연가스 사업부 구성원의 불안정한 미래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2019년, 토탈에너지스는 신사업 전문성 확보와 직원들의 ‘공정한 전환(Just Transition)’을 위해 ‘Better Together’ 캠페인을 선포한다. 기존 구성원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메시지다. 토탈은 캠페인의 일환으로 현재와 미래 직무의 스킬을 정의한다. 그리고 내부 시스템을 개발하여 조직 내 모든 구성원이 직무별 필요 스킬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학습과 코칭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에서 요구하는 스킬을 보유하면 해당 포지션에 지원할 수 있도록 내부 이동 제도 또한 마련한다. 전문성만 갖춘다면 석유 사업부 구성원에게도 태양광 사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2021년 토탈에너지스의 채용 1만여건 중 75%는 내부 채용이다. 고용 안전성과 외부 채용 부담 완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기존 직원들과 함께 신재생에너지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담대한 여정에 성공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IBM, 유니레버, 토탈에너지스 세 기업은 스킬 중심 HR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구성원과 조직이 상생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스킬에 집중함으로써 얻는 혜택은 명확하다. 기업은 최적의 인재를 적시에 탐색하고 배치하여 외부 채용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구성원은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고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업무를 찾아 전문성을 개발할 수 있다. 고용가능성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고 업무몰입 또한 높아진다.

그 어느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은 시기다. 언제 또 다른 질병, 전쟁, 경제 침체와 기술이 위기를 불러올지 모른다. 향후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를 대비할 수는 있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쇠퇴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와중에, 스킬을 일일이 정의하고 이를 중심으로 인사체계를 재편하는 작업은 번거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직과 구성원은 현재를 인지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

김형선 MERCER Korea 수석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