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감을 보면 일단 흥미가 동하는 기질 덕분에 집에 도감류 책들이 여럿 있다. 55개의 외딴 섬에 대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지도와 함께 담아 낸 책 <머나먼 섬들의 지도>,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가 정성껏 그린 풀컬러 요괴 화집 <요괴 대도감>, 5000편의 콘텐츠에서 가려 뽑았다는, 이렇게 행동하면 반드시 캐릭터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전형적인 신호탄인 ‘사망 플래그’(예컨대 보스에게 작전 실패를 보고하는 간부)를 91가지로 정리한 <사망 플래그 도감>,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을 구경하다 발견한, “모두 사실로 판명된 놀라운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세계진문기담>, 만일 내가 공포영화 속 인물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가이드가 정리돼 있는 <공포영화 서바이벌 가이드>. 이렇듯 도감의 대상과 장르는 무궁무진하여 도감에 대한 도감이 나와도 될 것만 같다.
볼이 빨개질까 걱정하는 볼빨간 이들의 진짜 속마음은
온라인 서점 신간 목록을 훑어보던 중 5월 초 출간된 신간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을 마주했을 때 역시 책 정보부터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전’이라니, 게다가 ‘99가지 강박으로 보는 인간 내면의 풍경’이라니, 곧장 소장 도감 목록에 더해도 좋을 책일 듯한 예감이 발동하였다. 여덟 개의 부에 걸쳐 공포증과 강박증이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었고, 마지막 8부에서 ‘모든 것에 대한 공포증’이라는 항목을 발견하고는 구매를 결심했다. 도감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책을 꼭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는 책을 받아 보자마자 ‘모든 것에 대한 공포증’부터 찾아 펼쳤다.

‘모든 것에 대한 공포증’은 1929년 오스트리아 빈에 사는 19세 학생 ‘헤르만 G’에게 그의 여동생이 죽은 뒤부터 발현된 증상이다. 늘 여동생 그레텔을 시기하며 그레텔이 아플 때 죽기를 바랐던 헤르만 G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 그리고 자신 역시 그에 대한 벌로 같은 비극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음…. 헤르만 G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외려 너무도 이해 가능하여 다소 김이 빠졌다. 나는 다시 목차로 돌아가 나에 관한 증상들을 찾아보았다.

일공포증. ‘게으름의 새로운 이름’으로 불린다는 일공포증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 손발톱뜯기강박증. 하루에 8~10시간씩 손발톱을 뜯어내던 T가 아이들과 수영장을 갈 수 없었다는 어려움에 크게 공감이 되었다. 친구들과 수영장에 갔을 때 수없이 뜯어 까슬까슬해진 손발톱이 시간이 지날수록 반투명하고 거대하게 부풀어오르는 것이 부끄러워 계속 물속에 머무르고만 싶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적면공포증. 얼굴이 곧 빨개질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정말로 얼굴이 빨개지는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에 대한 공포증이다. 한때 별명이 홍익인간이기도 하였던 나는 이 문장에서 실제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홍조는 가짜로 빨개지는 척할 수 없는 무의식적 반응이므로 사회적 목적이 있을 거라고 그들은 추측한다. 즉 홍조는 자신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며 집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의미로 읽혀 속임수 방지와 신뢰 구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나의 홍조를 큰 불편으로 여기면서도 내심 진심을 전하는 수단으로 삼던 나를 적중하는 진단이었고, 곧 ‘간파공포증’ 같은 것이 발동하여 재빨리 6부를 펼쳤다.
볼이 빨개질까 걱정하는 볼빨간 이들의 진짜 속마음은
6부는 ‘시대의 징후, 집단 유행’에 관한 강박들의 목록이다. 돌이켜보면 나 개인의 부끄러움을 집단 증상에 대한 공감으로 위로받고자 했던 것 같다. 웃음광. 1960년대 탄자니아의 한 기숙학교에서 최초로 발생한 집단 증상으로, 세 명의 소녀가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자 곧이어 같은 반 친구들에게도 웃음 발작이 번졌다. 두 달 뒤 학교는 몇 개월 동안 학교 문을 닫기로 결정한다. 탄자니아의 한 소아과 의사는 이 증상을 사회적 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발현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도시 이주를 강요하던 정부 정책을 그 원인으로 짚었다.

튤립광. 1634~1637년 네덜란드에서 튤립 구근 가격이 폭등하다 갑작스레 폭락한 탓에 수많은 삶이 파탄 지경에 이른 국가적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잘나가는’ 튤립 한 송이의 가격은 무려 “황소 네 마리, 통통한 돼지 여덟 마리, 살찐 양 열두 마리, 포도주 140갤런짜리 두 통, (⋯⋯) 은잔 하나, 침대 하나” 등과 맞먹었다고 한다. 이 현상이 부풀려진 것이라고 주장하던 역사학자 앤 골드거는 그러나 튤립 광풍의 여파가 상당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의 가치가 송두리째 의심받기 시작했다”고 쓴다.

대부분의 강박증은 단단한 논리를 품고 있다. 여기서도 나는 보물이기를 바랐던 튤립의 가치가 하루아침에 소멸해 버렸으니 모든 걸 의심할 만도 하다는 생각으로 튤립광에 대한 이해에 이르렀는데, 그러자 ‘모든 것에 대한 공포증’의 소유자 헤르만 G가 다시 떠올랐다. 헤르만 G 역시 죽기를 바라던 여동생이 하루아침에 소멸해 버렸으니 무엇이든 의심하고 두려워할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더 이상 ‘모든 것에 대한 공포증’이 시시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김 빠진다고 여겼던 것이 미안해졌다. 내게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은 헤르만 G로부터 출발하여 나를 지나쳐, 여러 집단과 사회를 거친 뒤 다시 헤르만 G에게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제멋대로 도감을 읽다 보니 뜻밖의 작은 여행을 했다. 언젠가 도감에 대한 도감이 출간된다면 세계 일주와도 같은 긴긴 여행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